한때는 열심히 사는 것만이 삶인 줄 알았다.
남보다 목소리 높이진 않았지만 결코 턱없이 손해 보며 살려 하지 않던 그런 것이 삶인 줄 알았다.
북한산이 막 신록으로 갈아입던 어느 날 지금까지의 삶이 문득 목소리를 바꿔 나를 불렀다.
나는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가? 어디를 그렇게 바삐 가고 있는 건가?
반짝이는 풀잎과 구르는 개울, 하찮게 여겨왔던 한 마리 무당 벌레가 알고 있는 미세한 자연의 이치도 알지 못하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 알고 있는 듯 착각하며 그렇게 부대 끼는 것이 삶인 줄 알았다.
북한산의 신록이 단풍으로 바뀌기까지 노적봉의 그 벗겨진 이마가 마침내 적설에 덮이기까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나는 그렇게 다 아는 것처럼 살아왔다.
출처: 김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