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번역 과정이 한국 근대화에 미친 영향 조명
근대 번역어 탐구를 통한 한국 근대사 재고찰 필요성 제기

인천투데이=신현수 시민기자│

<번역과 일본의 근대>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마사오 저 | 이산
<번역과 일본의 근대> 최경옥 저 | 살림출판사 

'individual'과 'society'라는 단어가 있다. 'individual'은 '개인'으로, 'society'는 '사회'로 번역해서 쓰고 있다. 지금이야 별다른 의문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번역 초기 'individual'을 '개인'으로, 'society'를 '사회'로 번역하는 일이 쉽고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individual'이 모인 게 'society'인데, 봉건시대에는 'individual'이 없었으니 당연히 'society'도 없었다.

없는 현실을 번역하려다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individual'은 "독자(獨者), 독일자, 일신, 일개인" 등이 각축하다가 '개인'이 언중의 선택을 받았다. 'society' 역시 "정부, 동료, 동료집단, 인민의 회사, 동료 회사, 회사, 총체인, 교제, 모임, 인간 교제, 사회" 등으로 번역되다가, 최후에 '사회'가 남게 되었다.

번역을 통해 탄생한 근대 개념어들

김영삼 정부를 '문민정부'라고 불렀는데, '문민'이라는 단어는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졌을까? 1946년 9월 일본 국회의 한 위원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A: '平人'으로 하면 어떨까요? '凡人'이라고 해도 뜻은 거의 같지만.
B: '文化人'이라는 말도 생각해 볼 법하군요.
C: peaceful pursuit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는 취지니까 '平和業務者'라고 하면 되겠죠.
D: '民人'은 어때요?『大英和辭典』에 따르면 군인과 성직자를 제외한 사람입니다.
E: '文人'이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B: <語苑>에 '文臣'이란 말이 있어요. '文官'이라는 뜻으로 '武官'과 대비되는 말입니다.
F: '軍部大臣文官'에서의 '文官'의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없을까요?
G: '臣'에는 군주의 신하라는 뉘앙스가 있으니까 '文民'으로 하면 어떻습니까?

일본 귀족원 '제국 헌법 개정안 특별위원회 소위원회'의 속기록이다. 연합군 총사령부(GHQ)가 헌법 초안 제66조에 추가를 요구한 조항, "Prime Minister and all Ministers of the State shall be civilians"에서 'civilian'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한 기록이다. 일본국 헌법 제5장의 일절인 "내각총리대신을 비롯한 국무대신은 '文民'이어야 한다"라는 조항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자유, 과학, 민족, 국제, 권리, 본능, 철학, 민주주의, 연설, 의무, 정서, 공화국, 의식, 문명, 사진, 전기, 발명, 신문, 철도, 위생, 관념, 추상, 금융, 생산, 광장, 경찰, 논문, 보험, 사상, 경제, 자연, 건강, 통계, 혁명 등등의 단어도 모두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법률, 과학, 철학, 문학, 역사, 기술 등의 분야에 걸쳐 일본에 없던 서구 문물들을 들여오려니 새롭게 단어를 만들어야 했다. 번역을 빼놓고 일본의 근대를 말할 수 없다. '일본의 근대'는 '번역'의 다른 이름이었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 |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마사오 저 | 이산
번역과 일본의 근대 |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마사오 저 | 이산

일본의 근대화와 번역

일본은 왜 그렇게 '번역'에 진심이었나? 일본의 어떤 사람과 집단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번역했나? 우리가 쓰고 있는 단어 중 어떤 것들이 일본을 통해 들어왔나? 평소에 궁금했던 주제 중의 하나였다.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마루야마 마사오, 가토 마사오가 함께 지은 <번역과 일본의 근대>, 최경옥이 지은 <번역과 일본의 근대> 등 두 권을 읽었다. 두 책은 책 제목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출판계에서는 같은 제목의 책이 용납되는지 궁금하다. 책의 서지를 살펴보니, 마루야마, 가토의 초판이 2000년이고, 최경옥의 초판은 2005년이다.

마루야마, 가토가 함께 지은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일본 근대사상 대계(전 23권) 중의 한 권인 <번역의 사상>의 해설 격으로, 가토가 질문하고 마루야마가 대답하는 문답 형식의 책이다.

가토가 마루야마에게 질문한 내용을 요약하면, "번역의 배경, 즉 메이지 시대 초기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무엇을 번역했는가, 무엇을 번역할 필요가 있었는가, 어떤 사람이 번역했는가, 왜 번역주의를 취했는가, 오늘날의 일본과는 달리, 왜 그토록 철저하게 번역주의를 취했는가, 어떻게 번역했는가, 메이지 시기 일본의 번역주의가 남긴 공과, 즉 나중의 일본 문화에 어떤 긍정적·부정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등이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 | 최경옥 저 | 살림출판사 
번역과 일본의 근대 | 최경옥 저 | 살림출판사 

메이지 유신과 번역주의의 등장

메이지 시기, 페리 내항 등 일본에 충격적인 사건들이 일어났다. 서양과 치른 몇 번의 전쟁에서 패배한 일본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꿔버렸다. 서양에 졌다고 인정하는 순간, 메이지 정부는 쇄국의 이데올로기였던 '존왕양이'를 재빠르게 버리고, 막부를 몰아내는 메이지 유신을 단행했다. 그들의 구호는 자본주의화의 원리에 입각한 부국강병, 문명개화였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앞장섰다.

그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생을 보내고 시찰단을 파견했다. 유학이나 견학 이상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책이었다.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번역밖에 없다는 번역주의가 팽배해지면서 많은 번역서가 양산되었다.

이 시기, 서양에 대한 정보나 지식을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일본어로 번역한 책들이 무려 만 권 이상,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근대화와 관련해서 메이지 정부는 운이 무척 좋았다. 19세기 후반은 놀라울 만큼 일본에 운이 좋은 시기였다. 서양 세력은 일본 해안까지 왔지만, 일본을 침략할 만한 처지는 못됐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와, 프랑스는 프로이센과 전쟁 중이었고, 미국은 남북전쟁 와중이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메이지 정부는 중국이 아편 전쟁 등으로 무참히 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나서 재빠르게 메이지유신을 단행했고, 서양을 모델로 근대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유신 직후 많은 유학생을 서양으로 보냈고, 구미 시찰을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 등을 파견했다.

일본은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해 많은 정보가 필요했고, 이것이 바로 번역이 필요해진 배경이다. 특히 군대가 가장 빨리 근대화됐다. 음악도 군악대부터 시작됐다. 일본 근대화의 첫걸음은 외국인 교사, 유학생, 시찰단, 그리고 '번역'이었던 것이다.

신조어 창출과 일본 근대화의 한계

신조어는 거의 모두 한자였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지만 일본어에서 한자는 "피해갈 수 없는 타자"였다. 한자 어휘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신조어를 만든 방법은 세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기존 한자의 의미를 바꾸지 않고 조합해서 쓴 경우, 두 번째는 이전부터 있었던 한자의 의미를 바꿔서 사용한 경우, 세 번째는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낸 경우 등이었다.

메이지 초기의 번역서는 군사 관계의 병법이 두드러졌고, 과학기술 쪽에서는 자연과학, 그중에서도 물리나 수학보다는 화학 분야의 번역이 많았다. 섬유산업의 염료, 군사 분야의 화약, 농업 분야의 비료 등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근대의 한계 또한 분명하다. 문화적 '일방통행'이었다는 것이다. 서양 문물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을 뿐, 일본의 문물을 서양이 번역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방통행은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자기를 주장하기 위해 군사력을 선택했고, 그것이 실패한 뒤로는 경제력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챗지피티4o에서 제작한 관련이미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챗지피티4o에서 제작한 관련이미지

근대 번역어의 성립 과정 : '자유'와 '권리'의 번역 과정

최경옥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를 중심으로 신조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몇 가지 더 살펴보겠다.

먼저 '자유', 영어의 'freedom'이나 'liberty'를 번역하면서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던 '자유'를 근대적 의미로 '전용'했다.

'자유'라는 말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던 단어였다. 일본에서는 '제멋대로'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그래서 '자유'는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자주, 자재' 등과 각축하다가 가장 부적절한 어감을 가지고 있던 번역어가 승자에 위치에 서게 되었다. 가장 적절한 번역어가 반드시 채택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는 사례다.

다음은 '권리'. 현재 'right'의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는 '권리'는 번역어 가운데서도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right'는 원래 '정직하다'라는 의미이다. 'right'의 본연의 의미는 도덕적인 올바름에서 시작된 인간이 가져야 하는 것으로, 힘과는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말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본연의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힘을 나타내는 '권(權)' 또는 '권리'가 번역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만다. '자유'처럼, 번역어로 선택된 단어가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아니라는 또 하나의 실례다.

'사진'의 번역과 의미 변화

다음은 '사진', 처음으로 사진기가 일본에 전해진 1840년대 이후, 'photograph'에 대한 번역어로 사용된 것은 '사진'만이 아니었다. '은판', '사진화상, '지화(紙畵)' 등의 번역어가 있었는데, 188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photograph'의 번역어 중 '사진'이 다른 번역어를 누르고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게 됐다.

원래 '사진'은 번역어로 사용되기 이전에도 '실제의 모습을 그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였다. 그것이 1840년대 사진기가 일본에 전래 되면서 번역어로서 사진기로 촬영한 영상이라는 의미로 전용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근대 경험과 한국의 '삼중 번역'

일본의 근대 경험과 번역이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수입한 서구 문명이 사실상 일본에 의해 한 번 이상 걸러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근대화와 번역의 문제는 우리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의 근대화를 정리하려 할 때 일본의 근대와 번역 과정에 대한 고찰은 피해갈 수 없다. 근대 시기 번역에 관한 한 우리는 일본에 '무임승차'하고 있다. 그들의 번역 과정과 역사를 너무 쉽게 들여와 사용하기만 했다.

적당한 비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2024년 현재 일본 국적 노벨상 수상자는 물리학상 9, 화학상 8, 생리학·의학상 5, 문학상 2, 평화상 1명 등 25명, 일본 출신 외국 국적자까지 합치면 30명 가까이 된다. 아마도 일본이 그동안 번역 등 기초학문에 대해 오랜 시간 투자했던 것들의 결과물일 것이다.

여기서 잠시 우리를 돌아보면 한숨만 나온다. 대통령의 "나눠먹기식, 갈라먹기식 예산은 검토할 필요가 있다"라는 말 한마디에 33년 만에 R&D 예산을 대폭 삭감하더니, 1년 만에 원위치로 되돌리면서 "사상 최대, 역대 최대 규모"로 늘렸다며 자화자찬하는 정부.

번역은 "단지 외국의 개념과 사상을 수용하는 행위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타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자각하는 문화적 실천"이다. 근대 번역어의 성립 과정에 대한 고찰은 곧 근대사에 대한 고찰이다.

슬프지만, 한국의 근대는 서구, 중국, 일본과의 상호 작용으로 형성된 "삼중 번역된 근대"다. 한국의 근대를 온전히 복원하려는 노력은 어쩔 수 없이 번역어의 탐구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 모임(방갈모) 상임대표, 국제민주연대 이사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서울문화재단 이사, 인천문화재단 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신현수 시인은 현재 사단법인 인천사람과문화 이사장, 비영리민간단체 라오스방갈로초등학교를 돕는 모임(방갈모) 상임대표, 국제민주연대 이사로 일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작가회의 사무총장,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직무대행), 서울문화재단 이사, 인천문화재단 이사, 6.15민족문학인남측협회 집행위원 등으로 일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