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의 저서 '영성 없는 진보'로 본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
"전체와 하나 되는 믿음,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정치의 필요성"

인천투데이=신현수 시민기자 |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김상봉 저 | 온뜰

운동가의 삶, 그 의미와 성찰

거의 평생을, 소위 '운동'을 하면서 살았다. 교육 운동을 했고, 시민운동을 했고, 문학운동을 했다. 현재는 시민사회단체와 봉사단체의 대표로 일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시민운동을 하거나, 시를 쓴다는 건, 도를 닦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참고, 견디고, 양보하고, 희생하고, 겸손하고, 자식을 남들 보내는 학교에 보내고, 그래서 자식을 평범하게 키우고, 잘난 척하지 않고, 내 것을 더 내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운동이란 별 게 아니라, 내 시간과 돈을 사회에 내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대가를 바랐냐고? 전혀 아니다. 왜 그렇게 살아왔냐고? 별다른 뜻은 없다. 다만, 내 자식들이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나은 나라,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가게 하고 싶어서 그랬다. 거창하게 말하면,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게 내가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살아오고 있는 단 하나의 이유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얘기를 지껄이고 있는 나를 용서하기 어렵다.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는 교만과 허세와 명예욕이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나는 할 수 있는 일만 적당히 하면서 살았다. 반대로,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목숨까지 바친 선배와 친구와 후배와 제자들이 있다. 나는 아직도 살아있고, 그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남 앞에 서는 사람들, 직업적으로는 정치인, 선생, 목사, 스님 등은 늘 '도를 닦으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도를 닦는 게 너무 막연하다면 '성찰'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끊임없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는 태도. 그런 기본적인 태도가 없다면 아마 그들은 거의 사기꾼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은 하루, 한순간이라도 더 성찰하지 않으면 아마 평범한 사람보다도 죄를 훨씬 더 많이 짓고 살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일은 끊임없이 남 앞에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성과 진보, 그 깊은 연관성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김상봉 저 | 온뜰
영성 없는 진보 –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를 생각함 |김상봉 저 | 온뜰

목숨을 바쳐 싸우던 혁명가들이 나이 들고 난 후 '영성'에 빠져든 사람들을 많이 봤다. 젊은 시절에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영성이 혼자만 공중 부양을 하고, 혼자만 천국 가고, 자기 스스로만 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차에 만난 책이 김상봉 선생의 <영성 없는 진보>다. <영성 없는 진보>는 문고판 크기의 140여 쪽밖에 안 되는 작은 책이다.

그러나 그가 던지는 문제의식은 책의 크기처럼 가볍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다. 이 책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원인에 대한 성찰'이다. <영성 없는 진보>를 요약, 발췌하면서 김상봉 선생의 생각을 따라가 보려고 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 그 본질을 찾아서

한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 등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다. 특히 한국 정치는 바다에 완전히 빠지기 직전의 난파선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저자가 말하는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은 두 가지다. 권력 타도에는 성공했지만 '민주주의 형성'에는 실패했다는 것, 그리고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영성)이 정치에서, 특히 진보 진영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한국 정치의 파탄이 '영성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성은 종교적 의미의 좁은 영성이 아니라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을 의미한다.

기독교인이라면 전체는 신일 것이다. 원효의 '일심', 이황의 '천인합일', 수운의 ‘오심즉여심’, '천지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영성이란 '특정한 종교와 무관하게 우리가 품을 수 있는 마음의 소질이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청일전쟁 평양전투 판화(출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청일전쟁 평양전투 판화(출처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 이래 이 나라의 진보적 정치활동이란 '전체를 위한 자기희생'이었다. 우리 역사가 진보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 고통에 응답하고, 우리 모두의 선을 위해 자기를 희생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내가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릴 수 있으려면, 세계가 나와 하나이며, 역사가 선을 향해 진보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오직 그 믿음 때문에 나는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전체와 하나이므로, 내가 전체를 위해 나를 버리는 것은 나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전체 속에서 나를 되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이 바로 영성이다. 그러니까 영성이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신비적인 체험이 아니라,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굳건한 믿음 위에 존립하는 것이다.

공화국과 경제의 공공성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결정적인 지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국가 형성에 실패했다. 그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립에서 공화국의 형성으로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런데 민주 국가와 공화국은 다르다. 민주가 자유로운 시민의 주권을 의미한다면, 공화국은 그 국가가 공공선.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 국가가 '모두에 의한 국가'라면, 공화국은 '모두를 위한 국가'다.

아무리 국가가 모두의 뜻에 따라 운영되는 형태를 띠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모두를 위한 방향으로 운영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한갓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형식은 실질과 부합할 때, 온전한 것일 수 있다.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라는 형식이 공화국이라는 실질과 부합되지 않는다면, 형식적 민주주의는 시민적 삶의 온전함을 담보할 수 없다.

이처럼 시민적 삶의 온전함을 담보하지 못할 때, 민주주의라는 형식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이기도 하다. 공화국이 모두의 이익을 위한 국가라면,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의 공공성 위에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국가가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고 할 때, 그 이익이란 다른 무엇보다 '경제적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민주주의가 정치적 권리의 동등권 위에 존립한다면, 공화국은 경제적 이익의 공공적 향유에 존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경제의 공공성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공화국의 요체이다.

영성의 실종과 정치의 변질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도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도, 그 믿음에 근거해 전체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정신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바로 이런 믿음의 실종에서 비롯된다.

왜냐하면 나와 세계가 하나라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나면, 정치는 나를 던져 세계를 구하겠다는 열정이 아니라, 단지 권력을 쟁취하고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욕망의 경연장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나라를 바로 우리가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들었다.

이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집단적 자살을 향해 치닫고 있다. 조선 왕조가 썩은 흙담 처럼 무너져 가던 시절, 동학이라는 새로운 믿음의 언어가 필요했던 것처럼, 국가가 아니라 민족 자체가 소멸의 위기에 처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망적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어떤 영성과 믿음이다.

6.10민주항쟁 21주년인 지난 2008년 6월 10일 개최된 촛불집회
6.10민주항쟁 21주년인 지난 2008년 6월 10일 개최된 촛불집회

전태일, 영성과 혁명의 상징

'혁명과 영성'을 말할 때 우리는 1970년대의 전태일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조금이라도 감동한 사람이라면, 초등학교조차 마치지 못한 가난한 청년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놀라운 정신의 불꽃을 피워 올릴 수 있었는지 그 정신적 배경을 묻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일은 결국 정신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을 전태일 되게 만든 것은 자기 개인의 가난과 고통이 아니라 세계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전태일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낀 사람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믿음, 전체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나와 그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즉 전태일의 믿음이다.

전태일의 배후에 예수가 있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속에서만 우리는 세상의 고통 속에 자신을 던질 수 있다. 이런 믿음이 아닌 다른 모든 종교적 신앙이란, 믿음의 힘으로 세상의 고통에 자기를 던지는 헌신의 열정이 아니라,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자신만 벗어나려는 이기적 욕망의 표현일 뿐이다.

그러니 그런 신앙이 이 세상에 아무리 넘친다 한들, 그것이 세상을 고통에서 구할 수는 없다. 오직 믿음이 역사에 대한 믿음,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 그리고 내가 그 전체와 하나라는 믿음일 경우에만, 그런 믿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영성과 사랑의 의미

영성만이 세계의 고통에 자신을 던질 수 있게 한다. 타인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므로, 영성이란 사랑의 한 형태다. '영성'은 단순히 특정 종교에 관한 단어가 아니다.

영성이란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이자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이다.

권력과 정치인의 현실

권력의 자리에 한 번이라도 머물렀던 자들은 그 자리에 다시 올라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보수, 진보 떠나서 대체로 그렇다.

현재 대한민국에 진정한 의미의 진보 정치인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전체가 하나라는 믿음'을 갖는,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진보 정치인이 몇 명이나 될까? 나야 정치인이 아니지만, 평생 남 앞에서 서서 떠들어 온 자로서 나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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