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㉟ 이봉구와 오장환(2)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이봉구는 함경도 북청으로 끌려가 고생한 후 경성에서 오장환, 이육사, 서정주 등과 어울리며 문학 활동에 전념했는데 카페는 약속도 없이 수시로 만나는 공간이자 사무실과 같았다.

경성 장곡천정(현재의 소공동)에 있던 미모사에서 오장환의 ‘성벽’(풍림사 1937)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가 어두운 시대에 문학 열정으로 가득했던 빛나는 청춘의 시기로 이봉구는 회상했다.

미모사는 2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아담한 크기의 카페로 경영자가 금전적 이해를 떠나 문학청년들의 활동을 이해하고 품어주는 공간이었다.

매일신보 1930.10.1. 무대배우 강성연.
매일신보 1930.10.1. 무대배우 강성연.

예전에 토월회로 연극에 몸담았던 강성연이 미모사 주인이라서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한 문학 청년들과 온정을 나누었다.(사진 매일신보 1930.10.1. 무대배우 강성연)

당시는 출판기념회도 일본경찰에 신고 허가를 받던 시기였고 형사 끄나풀이 불시에 다녀가는 현대의 문화행사 개념과 커다란 거리가 있는 복잡한 행사였다.

오장환 출판기념회에 함께했던 이육사는 문학에의 열정을 불태우면서도 이봉구에게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싶다는 말을 했다.

경성일보 1937.5.7. 단성사 ‘사막의 화원’ 광고.
경성일보 1937.5.7. 단성사 ‘사막의 화원’ 광고.

이봉구는 단성사에서 개봉한 ‘사막의 화원’을 이육사와 같이 봤고 그날 이후 술자리에서 자주 영화 제작 열망을 표명했다고 전한다.(사진 경성일보 1937.5.7. 단성사 ‘사막의 화원’ 광고)

‘사막의 화원’ 같은 영화를 만들면 좋겠고 고향의 안동소주가 맛이 좋다며 입맛을 다시던 이육사를 그리워했다.(사진 평화신문 1955.7.14. 사막의 화원)

이육사는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4년 옥사했고 오장환 등은 1946년 이육사 시집을 발간한다. 시인 김수영의 해방 직후 배경 글에 등장하는 극단 ‘청포도’가 오장환이 관여했던 곳이다.

평화신문 1955.7.14. 사막의 화원.
평화신문 1955.7.14. 사막의 화원.

이봉구의 카페 회상기는 대체로 격동의 시대 아픈 기억들 사이사이의 낭만과 열정이 머물던 카페의 얼굴들을 그리워하는 이야기이다. 미모사 외에도 이봉구가 회상하는 카페 중 종방 ‘가네보’가 있다.(사진 가네보의 실내 풍경, 대경성사진첩)

가네보는 패션 의류를 파는 회사로 같은 건물에서 세련된 카페를 운영했다. 1936년 통계로 백화점 출입이 많은 일요일 미쓰코시 백화점(12만6000), 화신백화점(11만7000), 종방(1만8000) 규모였다.

가네보의 실내 풍경, 대경성사진첩.
가네보의 실내 풍경, 대경성사진첩.

당시 흥청망청 향락의 카페가 주류를 이뤘지만 베이커리 카페를 포함 다양한 형태가 존재했고, 문화예술인이 드나들던 카페를 기록한 이봉구의 회상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 문화사적 측면에서 빛을 발한다.

현대인이 우유와 빵으로 점심을 먹는다는 의미는 바쁜 일과 속에서 매우 간단하면서도 비교적 저렴한 식사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100년 전의 글에서 차와 빵을 주문해서 먹는 사람은 학력이 높고 매우 세련됐으며 경제적으로 풍족한 사람을 의미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5년 신의주 감옥의 풍경을 기록한 잡지 삼천리의 ‘옥중기獄中記’가 있다.

구등식九等食 수수밥 한 덩이式 때마다 조막만한 관식官食이나 어더먹고 생生배를 골코 안젓는 만흔 피고인被告人들은 그가치 그저 남아 나가는 계란鷄卵이나 우유牛乳 빵갓흔 것을 바라볼 때 입안에서 군침이 마를 새가 업는 것이엇다.

글에서 구등식九等食이라는 의미는 예전 감옥에서 등급별로 중량이 다른 식사가 틀에 맞춰서 나왔고 통상 ‘가다밥’이라 불렀다.

이봉구가 고문과 조사를 받다가 구치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주재소 직원이 건넨 사탕 하나가 눈물겹게 고마웠다는 내용에서도 수감자들이 겪는 열악한 영양상태를 설명한다.

일본 군국주의의 통제 방법으로 감옥에서조차 순응하느냐, 저항하느냐에 따라서 부족한 식사량에도 차등을 뒀다.

감옥에서는 항상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고 사식과 의류 등을 넣어주는 옥바라지로 주변 가족의 고생도 불가피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가 옥고를 치르고 출옥 후 사망자가 많았던 배경 중 하나이다.

100년 전의 감옥에서도 빵과 우유를 사식으로 넣었을 정도로 한반도 식문화에서 빵이 보편화됐으나 아직은 경제적 여유가 있던 사람들에게 한정된 식품이었다.

’100년 전 빵 이야기‘ 연재를 마치며

문인들의 빵과 카페 이야기 두 편으로 연재를 마칠 예정이다. 오래전 하인리히 E. 야곱 ’빵의 역사‘를 재밌게 읽은 후 관련 서적을 찾아 도서관을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대개는 빵을 분류하고 제조하는 내용이 많았으나 일본의 경우 빵, 커피만을 주제로 수필이나 시집 등 다양한 형태로 출간된 책들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빵이 식문화 속에 수용, 정착되는 과정에서 여러 경쟁 식품과 과제들이 있었을 것인데 이를 극복하며 대중화가 이뤄지는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궁금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개인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빵을 주제로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내가 써보고 싶다는 충동도 가끔 나타났다.

비영리법인 꿈베이커리 이사 활동을 하면서 홈페이지에 올릴 ’빵 이야기‘ 십여 편을 써놓고 차츰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

연재 글에 넣지 못한 다소 딱딱하고 전문적일 수 있는 자료를 포함 단행본으로 만들 예정이다. 부족함이 많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읽어주고 관심을 보여준 독자에게 감사드리며 <인천투데이>의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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