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땅 대만서 일제 육군 대장이자 일왕 장인에게 던진 단검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96년 전인 1928년 5월 14일 타이완 타이중시에서 독립운동가 조명하(1905~1928, 향년 23세) 열사가 일왕의 장인이자 일제 육군 대장이었던 구니노미야(1873~1929, 56세 사망)에게 독을 묻힌 단검을 던져 척살했다.

조명하 의거 또는 타이중 의거로 불리는 이날 의거는 조선 청년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조명하가 타이완 타이중시에서 일왕의 장인이자 일제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에게 독이 묻은 단검을 던져 척살한 의거를 말한다.

대만에서 단검 하나로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 (사진출처 국가보훈부)
대만에서 단검 하나로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 (사진출처 국가보훈부)

조 의사는 황해도 송화 출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항일을 위해선 일제를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1926년 일본 땅으로 건너갔다. 이후 그는 한민족을 향한 차별적 대우와 모욕을 겪으면서 항일의식을 키워갔다.

이로 인해 조 의사는 추후 조국 독립을 위해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위해 타이완으로 건너갔다. 원래는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려 했으나 일제 통제와 감시를 피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비교적 감시가 덜한 타이완을 거쳐 중국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이후 그는 1927년 11월경 타이완에 도착했고 타이중시에 위치한 부귀원이라는 찻집에서 종업원으로 일했다.

조 의사는 타국 땅에서도 일제의 수탈 아래 고통받은 조선인들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훗날의 거사를 위해 중국인으로부터 칼 쓰는 법을 익혔다.

아울러 일제는 당시 중국 대륙 침략을 준비 중이었고 중국 산둥반도에 집결 중이었다. 지리적으로 타이완은 일제에 교두보와 같은 군사 요충지였다.

이러한 이유로 타이완엔 많은 일제 병력이 주둔했고 일왕의 장인이자 일제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가 검열사로 파견을 왔다.

“이곳에서 일본 왕족인 구니노미야를 내 손으로 주살하여 우리 겨레의 한을 풀리라.”

조 의사는 민족의 원수 중 한명을 처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그는 일제 육군 대장의 일거수일투족 일정을 살폈고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1928년 5월 14일, 조 의사는 단검 한 자루를 준비해 날붙이에 독을 발랐다. 조명하는 구니노미야가 병력 검열을 위해 군용차를 타고 타이중 도서관 앞 사거리를 지나가자 이때 단검을 꺼내 한순간에 차 뒤쪽에 뛰어올랐고 구니노미야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그러나 단검은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쳐 상처를 낸 후 차량 운전사 등에 꽂혔다. 조 의사는 거사 이후 소란스러운 군중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놀라지 말라. 나는 대한을 위해 복수하는 것이다.”

조 의사는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제 군인들에게 잡혔다. 이후 그는 1928년 7월 일제로부터 사형을 선고받고 1928년 10월 10일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이때 조 의사 나이 스물셋이었다. 조 의사가 현장에서 처단하지 못한 구니노미야는 1929년 1월 단검에 묻었던 독이 온몸에 퍼져 죽었다. 순국 전 조 의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지극히 평범했을 한 이십대 청춘은 암울한 시대 아래 꽃피어 조국을 위한 산화를 선택했다. 조 의사가 지켜 낸 대한민국은 1963년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에 위치한 조명하 의사 동상 (사진출처 국가보훈부)
경기도 과천 서울대공원에 위치한 조명하 의사 동상 (사진출처 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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