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임시정부, 한성임시정부, 대한국민의회 대통합
한성임시정부 법통 계승해 상하이에 통합 임정 수립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5년 전인 1919년 9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1919년 3월 1일 조선인들은 야만적인 일제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3.1 운동을 전개했다. 당대 지식인들은 3.1 운동으로 나타난 독립 열망과 의지를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1919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 맨 아래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보인다.  (사진출처 흥사단)
1919년 9월 17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 맨 아래 가운데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보인다.  (사진출처 흥사단)

이에 임시정부 수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됐고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임정은 상하이 임시정부뿐만이 아니었다.

3.1 운동이 국내 곳곳으로 확산하자 이 시기에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위한 임시정부 역시 국내외 곳곳에서 출범했다.

1919년 3월 17일 연해주에서는 대한민국의회(노령임시정부)라는 의회 중심 임시정부가 출범했고 같은 해 4월 23일에는 13도 대표들이 인천 만국공원(현재 자유공원)에 모여 한성임시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노선은 상이했다. 특히 상하이 임시정부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한 반면, 연해주 대한국민의회는 무장투쟁론을 주장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통합 임시정부의 필요성을 느꼈고 대한국민의회 원세훈 선생과 상하이 임시정부 도산 안창호 선생이 통합 논의를 주도했다.

3.1 운동 정신과 한성임시정부 법통 계승한 대한민국 통합 임정

그 결과 한성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고 대한민국의회를 흡수한 상하이 통합임시정부가 출범했다. 아울러 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법 전문에는 “3.1 운동 자주 독립 정신을 계승해 대한민국을 건설한다”는 점을 밝혔다.

현행 헌법 역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명확히 밝히고 있다.

통합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고 국무총리는 이동휘였다. 이후 통합 임시정부는 1926년 9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원제를 채택했다가 위원내각제로 자리 잡았다.

이로써 통합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 민족 독립을 위해 일제 치하 속 시련을 이겨내며 항일투쟁을 전개했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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