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⑲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1930년 경성에 신축 명치제과판매점이 들어서고 베이커리 카페가 성공하면서 빵을 판매하는 과자점도 영업 형태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미쓰코시, 조지아 등 경성의 4대 백화점도 과자점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커피, 차 등 다양한 음료를 마시는 매장을 함께 운영했다.(사진 경성 미쓰코시, 조지아 백화점 과자부 광고)

경성 미쓰코시, 조지아 백화점 과자부 광고.
경성 미쓰코시, 조지아 백화점 과자부 광고.

미쓰코시 백화점 5층 옥상은 문학작품에서 음료를 마시는 장면과 당시로서는 진기한 시설인 엘리베이터 운행 모습이 종종 묘사됐다.

거대한 5, 6층 ‘빌딩’체구 속을 혈관과 같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엘리베이터, 옥상을 장식한 인공적 정원의 침엽수가 발산하는 희박한 산소.

그리고 둥그런 얼굴을 가진 다람쥐와 같이 민첩한 식당의 위이트레스와 자극적인 음료와 강한 케이크의 냄새.

김기림의 ‘도시풍경 1’(1931)에 나타난 경성 백화점 풍경의 일부이다. 김기림의 글로 대략적인 분위기는 알 수 있으나 당시에 먹었던 빵의 종류와 모습도 자못 궁금하다. 여기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빵집 광고가 있다.

경성시내 중심가인 남대문 근처 ‘보래옥’의 빵 세밀화 그림광고가 주인공이다.(사진 경성일보 1931.7.12.)

경성일보 1931.7.12..
경성일보 1931.7.12..

광고 사진을 자세히 보면 빵그림 옆에 사인과 함께 그림을 그린 연도 1931 표기가 있다. 굉장히 먹음직스럽고 다양한 형태의 잘 구워진 빵들이 묘사됐다. 현대의 다양한 판매 빵과 전혀 차이가 없는 모습이 놀랍다. 빵집 보래옥은 규모가 큰 가게로 다양한 제품을 생산했다.

특이한 점은 1931년 광고에는 없었으나 1년 후인 1932년 7월 ‘역전 보래옥끽다점’ 광고가 등장한다.

1930년대 퇴폐적 카페 범람 속에서도 문화, 비즈니스, 사교적 측면에서 건전한 만남의 공간은 필요했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에서 베이커리 카페는 모던함과 고급스러운 공간으로써 기존의 카페와 구별되며 하나의 스타일을 점차 만들었다.

당시 유행했던 빵과 베이커리 카페 풍경만 보면 대단히 풍족하고 여유로운 모습이 연상되겠지만 경성의 상류층 대다수는 일본인이었고 일본에 협력적인 소수의 조선인만 누릴 수 있는 도시적 모습이다.

부연하면 일제강점기 매년 300명 정도의 의사 배출(조선인 112, 일본인 189명)이 있었고 경성의전, 평양의전 등 신입생 모집에서 조선인 비율은 3분의 1을 넘을 수 없었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이 사립이던 세브란스의전에 조선인 학생 비율이 높아 해방 후 일본 의료진이 없어진 의료공백을 그나마 막을 수 있었다.

여타의 전문인력도 유사한 구조였기 때문에 농촌인구가 대다수를 형성했던 식민지 조선의 삶은 글에 표현된 경성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1936년 김기림 글 ‘촌 아주머니’의 모습은 보편적 삶을 잘 그려내고 있다.

마을 아낙네들은 쌀값이 올라가는 것보다도 밀가루 값이 올라갈까 보아서 읍에서 돌아오는 우차편牛車便마다 걱정스럽게 밀가루 시세를 물어본다.

만주滿洲조를 팔던 가게 앞에는 조 대신에 밀가루 포대가 쌓였다.

장날이면 아낙네들은 소나무단을 머리 위에 이고 또는 팟되나 계란 개나 판 것을 모아가지고 그런 것도 없으면 강아지나 도야지 새끼를 붙들어 장에 이고 와서는 밀가루를 바꾸어 가지고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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