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㉒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샌드위치를 처음 먹기 시작한 18세기 도박사 샌드위치 백작 이야기는 이제 상식이 됐다. 개화기 조선사람이 샌드위치를 접했던 기록은 매우 다양하고 많으나 대부분이 해외유학, 공공업무 등 일본을 여행했던 사람들이다.

서양에서 샌드위치는 간편식이면서 저렴한 가격대의 음식으로 발달했는데 초창기 조선에서 판매된 샌드위치는 매우 고가의 음식에 속했다.

서양으로 유학한 사람들은 당연히 서민적인 샌드위치를 먹었겠으나 1910년대 일본 기차역에서 만나는 벤또(도시락) 중 샌드위치 가격은 15전이었다.

월미도에 대규모 관광단지가 조성돼 해수풀장이 있던 월미도조탕 매점에서 1923년 판매된 샌드위치 가격은 50전이었다.

현재의 화폐가치에 익숙한 독자들은 피부로 와닿는 금액이 아니라서 예를 들면, 1910년대 설렁탕은 10전이고 1930년 최초의 베이커리 카페인 명치제과 서양식 점심특선(Light meal) 가격이 35전이었다.

샌드위치는 만드는 방법과 재료에 따라 가격 차이가 발생할 수 있다. 당시 일본 기차역에서 판매된 샌드위치는 식빵 사이에 햄이 들어간 형태였다.

1919년 윤치호를 포함한 조선의 인사들이 가나야 경성부윤(서울시장에 해당)의 초청을 받아 그의 집무실에 갔을 때 음료수, 초밥, 샌드위치로 식사했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특별식에 속했다.

통상적으로 돼지 앞다리살로 만드는 햄은 제조법에 따라서 가격 차이가 발생할 수 있으나 당시 햄이나 소시지 가격은 비쌌던 모양이다.

그리고 햄, 소시지 등속의 이름이 생소해 바꿔 표현한 한문식 명칭 또한 낯설다. 1931년 삼천리에 실린 이관구李寬求의 북해도수도원 생활기 기록에서 햄이나 소시지 등의 표현이 있다.

벌서 저녁을 차려 식탁食卓에 노앗다. 식食팡 육찬肉饌 그밧게 가배차珈琲茶와 맥주麥酒까지 느러뇌엇다. 어제ㅅ밤에 한 여인女人의 친절親切히 준 백반白飯이 아직까지 다먹지 못하고 남아잇는데 이런 분외分外의 대접待接을 바더 참아 입에 넘어가지 아니하엿다.

위의 글에 나열된 식빵, 가배차(커피), 육찬, 맥주는 서양식 메뉴이며 고기반찬을 의미하는 육찬肉饌은 햄과 소시지로 보인다.

1931년 일본의 수도원에서 커피 포함 식빵과 햄이 놓인 식사를 보고 과분한 대접을 받아 차마 입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표현만 보더라도 당시에 귀한 음식으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1941년 일반 가정에서 샌드위치를 손쉽게 만드는 방법 몇 가지를 소개하는 기사가 있다.(사진 매일신보 1941.2.13.) 첫 번째로 소개된 방법은 ‘새고기 샌드위치’로 새고기란 단어가 낯설게 보이겠으나 닭, 꿩 등의 날짐승 고기를 말한다.

두 번째 방법은 ‘레바 샌드위치’로 역시 레바라는 단어 또한 어렵다. 중화풍 요리 중에 부추간볶음(레바니라) 요리가 있는데 바로 간을 재료로 만드는 요리를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동물의 내장을 비린내가 난다며 즐기지 않았지만 1941년이면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하던 시기라서 요리법이 추천된 것으로 보인다. 조리 방법에서 소금물에 담그고 피를 빼서 후추로 데치는 과정은 특유의 비린내를 제거할 수 있다.

왜 조선에서 한글로 발간된 신문 내용에 일본인이 내장을 싫어한다는 설명을 하느냐,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경성일보’는 일본어로 발간되는 조선의 최대신문이자 총독부 기관지였고 한글신문 ‘매일신보’는 그에 예속된 신문이었다. 미국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심했으나 법적으로는 평등했던 것처럼 식민지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매일신보의 기사는 조선에 거주하는 많은 일본인과 식민지 조선인을 항상 묶어서 방향을 결정한다.

1943년 매일신보의 북경지사장이자 특파원 신분으로 파견됐던 백철의 회고에 따르면 북경에서 백철에게 돈을 대주고 싶은 졸부들이 줄을 섰고 초호화호텔 북경반점 도박판에서 밤을 새우는 향락을 즐기는 시간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만큼 매일신보의 역할과 위상은 컸으며 총독부의 뜻을 반영하는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현재 샌드위치라는 단어는 음식에만 사용되지 않고 샌드위치 패널, 샌드위치 신세 등 건축자재와 문학적인 비유를 포함 다양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당시는 샌드위치라는 단어의 사용 범위가 그다지 넓지 않았다.

물론 지리적 특성이나 국가 간의 관계에서 샌드위치 상황을 표현한 내용이 있으나 이는 외국의 문헌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사용됐다. 작가나 기자들이 샌드위치라는 표현을 통해 의미를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시기는 음식 ‘샌드위치’가 대중화를 이룬 이후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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