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㉑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구한말 일본에 병합돼 식민지 조선인朝鮮人(조센진)을 독립군 등 저항적인 사람은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북방지역은 통상 북선北鮮으로 불렀다.

당시 선인鮮人(센진)은 경멸적 의미를 내포한 단어였다. 전에 언급했듯이 일본은 대륙진출 열망이 강해 북선北鮮지역 중심으로 기반산업을 강화했다.

평양은 북쪽 지역의 중심도시로 일본인 거주지가 일찍부터 발달했으며 상업기반을 중국인과 양분하던 상태였다. 북선北鮮 교통의 요지였던 평양의 빵, 제과산업은 꽤 규모가 있었다.

평양제과는 1920년 일본인 자본 25만원으로 설립됐다. 비교를 위해 예를 들면, 매일신보 1919년 12월 기사는 경성극장을 짓기 위해 자본금 10만원으로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과거 자본금 액수만 가지고는 규모를 알기 어려워 종업원 수 등의 자료가 필요한데 평양제과는 당시 불미스러운 사건 뉴스가 많아 역설적으로 자료가 풍부하다. 평양제과를 다루면서 개성제과 등 북선北鮮의 제과업 현황까지 알아보겠다.

1923년 9월 평양제과가 일본 사업주의 사기로 파산했고 경찰은 회사의 일본인 중역들을 체포 조사 중이라는 뉴스가 발표됐다.

평양제과 직공 50여명은 1927년 4월부터 동맹파업에 들어갔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평양제과는 상당히 악덕기업에 속했다고 여겨진다. 대다수인 조선인 노동자들의 요구를 정리하면,

1. 노동시간을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2시간으로 해달라.
2. 12시간을 초과하면 시간당 10전씩의 임금을 달라.

위의 요구 외에 기본급을 올려주라는 요구도 포함됐는데, 노동자들의 조건으로 보아 일요일을 빼면 최소 주당 72시간 노동을 훨씬 넘기면서도 초과 임금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사진 중외일보 1927.4.29.)

중외일보 1927.4.29.
중외일보 1927.4.29.

따라서 종업원 수가 50명 정도이지만 노동시간이 워낙 많아 현대의 기업 규모와 수평적 비교는 어려우나 생산량이 많은 회사였음은 확실하다. 다양한 빵과 과자류를 판매됐으나 1920년대 평양에서 유행하던 빵은 ‘현미빵(겐마이빵)’이었다.

개성제과는 1918년 창업했고 개성 지역에서 손꼽히는 회사였는데 특이하게도 대표자가 우상대禹相大라는 조선인이었다. 제과기술을 조선인에게 전수하지 않고 가업의 특성을 유지하던 일본의 특성과 1918년이라는 초창기인 점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이다.

자본금 1만7000원으로 설립된 개성제과는 개성지역 상공회의소 기록에도 손꼽는 기업으로 기록됐고 신문광고 신년인사에는 첫머리에 나오는 때가 있을 정도이다.(사진 고려시보 1941.01.1.)

고려시보 1941.01.1.
고려시보 1941.01.1.

신의주, 원산, 해주 등도 제과업이 활발했는데 함흥에는 20년대부터 함흥과자상 동업조합이 있을 정도로 양과자와 빵이 일찍 보편화됐다.

우리에게 함흥은 오랜 단절로 낯선 느낌의 도시인데 과거에는 언론매체에 자주 오르내리는 곳이었으며 철도 경함선京咸線이 경성역 출발 원산, 문평을 지나서 함흥으로 이어졌다.

1930년 3월 ‘북행천리’라는 함흥 여행기에 보면 경성역에서 출발할 때는 봄비가 내렸으나 점차 북으로 갈수록 눈으로 바뀌었고 결국 폭설로 기차는 함흥에 지연 도착했다. 함흥 사람들의 색다른 점은 남녀노소 모두 정강이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고 다녔다는 것이다.

눈이 많이 오는 특성에 목이 긴 장화를 신었던 모양인데 한반도 북쪽 끝자락은 기후에 따른 문화적 차이가 현격해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에겐 신기한 장면이 많았던 모양이다.

춥고 거친 기후의 북방지역은 러시아 연해주와 교류가 많은 탓이었던지 러시아빵은 1920년대 평양, 원산 등지에서 유행했고 후에 경성까지 퍼졌다.

당시 수도인 경성을 제외하면 제과산업 발달 시기와 분포를 보아서는 빵과 양과자 수요와 공급이 북방지역에서 활발했다고 여겨진다.(사진 조선신문사 1927.11.15. 함흥과자조합 점원표창 기사)

조선신문사 1927.11.15. 함흥과자조합 점원표창 기사
조선신문사 1927.11.15. 함흥과자조합 점원표창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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