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⑮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1923년 월미도에 빵집이 여러 곳 들어섰으며 그중 한 곳인 도제과소는 이미 인천 내륙에 개업 중인 상태에서 출장소를 개설했다.(사진 1924년 월미도매점 광고)

사진 1924년 월미도매점 광고.
사진 1924년 월미도매점 광고.

또한 조선신문 1924년 1월 5일 신년광고를 보면 월미도 말고 내륙 인천에서 도제과소와 또 다른 과자점 국수당 두 곳이 전국신문에 광고를 냈다.(사진 인천궁정 주소의 국수당)

사진 인천궁정 주소의 국수당.
사진 인천궁정 주소의 국수당.

이전과 달리 월미도 관광단지가 만들어지자 경성과 인천을 잇는 당일 여가생활 문화권이 형성된 덕택에 인천역을 중심으로 관광객이 몰리면서 인천의 상업시설들이 중앙 일간지 홍보를 하게 됐다는 생각이다.

총독부가 계획하고 만든 인천은 1927년 <별건곤> ‘인천仁川, 미두米豆나라 仁川의 밤 세상世上’의 제목에서 보듯이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도시로 각인됐다.

밤 열시까지는 월미도月尾島 해수욕장(潮湯)을 먼저 다녀와야겟다고 싸리재 마루턱이에서 승합乘合자동차을 기다려 타니 생기긴 경성京城뻐-스 보다 먼저 생겻다면서 노렁칠한 괴짝 갓흔 데에 태워가지고 5里쯤 되는 데에 20錢씩을 바드니 京城보다 배倍나 더 빗싸다.

위의 글은 인천역에 내려 월미도를 가는 여정이며, 경성보다 두 배나 비싼 인천의 버스요금은 관광지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바가지요금을 지적하는 글에서 웃음이 나온다.

또 하나의 빵집은 ‘대청과자점’으로 특이한 점이 있다. 다른 과자점들과 달리 코코아 등 다양한 음료를 파는 카페와 함께 묶음광고를 냈다는 사실이다.

카페는 앞선 글에서도 언급된 삼영제과회사 자본이 출점한 곳으로 커피, 아이스크림 등을 판매했는데 대청과자점과 나란히 광고했다. 2년이 지난 뒤 광고를 보면 월미도 관광단지에서 대청과자점만 남고 나머지 두 곳의 빵집은 사라졌다.

아마도 대청과자점은 조선총독부와 긴밀한 관계의 인물이나 자본이 설립한 빵집으로 보인다. 빵을 파는 과자점이 세 곳이나 관광단지에 입점한 이유는 빵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일본군국주의가 키우는 품목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교통의 중심인 기차역과 재판소라고 부르던 경성의 주요한 행정기관에서도 빵을 판매했던 사실은 단순한 의미를 넘어선다.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며 억압하던 종착지는 일본헌법에 따라 재판하고 형을 집행하던 곳이다. 지금의 법원 역할을 하던 당시 재판소 풍경을 보자.

일반인 공소控所에는 절수切手와 빵파는 일본인日本人 남자 두 사람과 경매신청競賣申請 하러 온 고리대금업자高利貸金業者 한 사람과산림소송사건 山林訴訟事件의 증인證人으로 호출呼出된 시골 사람들이 잇슬 뿐이다.

위의 글은 1926년 ‘별건곤’에 실린 경성의 주요 장소를 방문 풍경을 스케치한 기사의 한 부분이다. 경비가 삼엄한 식민지 통제의 핵심인 장소라 판매를 담당하는 직원도 일본인으로 구성된 오로지 두 곳의 상행위 매대 중 하나가 빵집이라는 사실은 의미가 크다.

초창기 빵집이 세 곳이나 들어섰던 월미도 관광단지 조성도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관심을 뒀는지 보여주는 1925년 4월 9일 매일신보 기사가 있다.(사진 총독별장 기사)

사진 총독별장 기사.
사진 총독별장 기사.

기사는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주말마다 인천을 방문해 경비가 매우 삼엄하다는 내용이다.

조선총독이 방문하던 시기가 월미도조탕 개장 직전인 것으로 보아 일반인 이용 전에 총독부 주요 인사들과 함께 온천욕도 즐기며 조탕 주변시설 시찰과 경제계 로비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군국주의 일본은 전쟁을 통해서 식민지를 넓혀가는 중이었고 군대 식량에서 건빵은 악천후와 급박한 상황을 대비한 비상식량으로 안정적 납품이 보장되는 민간 제빵회사 시스템 구축은 필수적이었다.

초창기 월미도에 빵집에 여러 개 생겨난 추가적 요인은 현대의 수학여행처럼 단체로 학생들이 다녀가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월미도에 대형수족관 계획이 있었던 점을 보면 조선총독부는 러일전쟁 승전기념지와 첨단 관광지로써 학생들의 필수 경유지 목표도 있었을 것이다.

초기에는 학교 단위의 단체 방문 기사가 있으나 이후 특별한 기사가 없고 빵집 수가 줄어든 점을 보면 관광객 증가에 따른 열차 운송이 학생의 대량운송까지는 받쳐주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