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⑱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풍차는 바람을 이용한 서양의 방앗간이고 밀가루가 여기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부터 알게 됐을까. 문학에서 빵을 떼놓고서 장 발장을 말할 수 없듯이 풍차와 돈키호테의 관계가 그러하다.

1920년대부터 세르반테스 ‘돈키호테’가 신문 신간소개 코너에 보이기 시작하는데, 풍차 사진 또는 그림만 처음 보고 작동원리를 추론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1924년 동아일보 기사에 ‘혜화동 풍차’가 있다.(사진 동아일보 1924.7.24.)

사진 동아일보 1924.7.24.
사진 동아일보 1924.7.24.

내용은 동소문 안 혜화동에 덕국(독일을 말함) 즉 독일사람들 사는 장소가 있는데 학교, 기숙사, 교당 등 각양각색이 갖춰진 곳으로 괴상한 물건인 풍차가 있다는 기사이다.

‘혜화동 풍차’를 아는 사람도 더러 있으나 무엇에 쓰는 것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고, 바람의 힘을 이용해 깊은 우물에서 물을 끌어 올리는 신식 두레박이라는 설명에 덧붙여서 서울에서는 귀한 명물 노릇을 한다고 말했다.

현대에 들어 우리에게 풍차는 돈키호테가 돌진했던 방앗간 풍차를 의미하며 바람개비를 이용한 동력장치와는 구별해서 인식하나 당시는 풍차로 통칭했다. 1931년 ‘동광’ 25호에 흥미로운 과학 기사가 있다.

늦어도 서기 2500년에는 지구상에 일편一片의 석탄도 없어질 것이다. 과학자들은 이 예언을 벌서 수십 년째 해 온다.

만일 우리가 거대한 풍차를 건설하야 풍력을 완전히 굴레씨운다 하면 그 역시 거대한 동력을 우리에게 제공할 것이다.

태풍이 거인의 손과 같은 풍차를 돌리면 그 동력은 고압의 전력을 발동케 하야 그 전압을 물로 통하야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절을 한다.

현대인이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석유 고갈에 대비한 대체에너지 문제를 고민했다면 당시는 석탄이 주원료였으므로 석탄 이후의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했던 모양이다.

다만 100년이 지난 21세기에도 제시된 해결 방향이 비슷한데 상용화 과정에서 몇 가지 난제를 아직 풀지 못한 점이 흥미롭다.

1932년 동아일보는 베를린 외곽의 풍차 사진과 함께 ‘혜화동 풍차’와는 다른 용도인 방앗간 역할을 자세히 설명했다.(사진 동아일보 1932.02.7.)

사진 동아일보 1932.02.7.
사진 동아일보 1932.02.7.

이 풍차의 주인은 빵집이어서 여기서 찌은 가루로 팡을 구어서 시내에 공급한다고 한다. 이런 풍차는 화란和蘭(네덜란드)이 본고장이라는 것은 누구나 잘아는 바이지만 독일獨逸 특特히 북독일의 농촌農村에는 상당히 많다고 한다.

1932년 기사에 네덜란드는 풍차가 많은 나라라는 사실이 이제 상식에 속한다고 했다. 계곡물의 낙차를 이용한 물레방아는 동서양 모두 보편적으로 사용됐지만 복잡하고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 풍차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발달했고, 지형적 특성상 네덜란드의 명물이 된 것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는 일 외에도 논농사에는 절대적인 요소이다. 일제강점기 농업인구가 많았던 때 수리조합을 중심으로 물 사용료에 시달린 농민들의 수세水稅투쟁은 생존의 문제였고 해방 후에도 계속됐다.

따라서 물에 대한 세금은 현대인도 익숙하나 형체가 없고 보이지도 않는 바람세 이야기는 낯설고 흥미를 끌면서도 당혹감이 함께 있다.

하인리히 E. 야콥의 ‘빵의 역사’에 보면, 1391년 성 오거스틴 수도원이 풍차를 건설하려는데 한 백작이 바람이 자신의 영지를 지난다는 이유로 풍차 건설을 금지했다. 우여곡절 끝에 풍차를 건설했으나 백작은 방앗간 주인에게 1년마다 바람 사용료를 물렸다.

또한 1651년 뉘른베르크 재판관 카스파르 클록은 “바람을 방앗간에 파는 것은 관헌의 특권이다”라는 황당한 판결을 내렸다. 동서양 모두 긴 역사에서 농민들의 삶은 고단했고 힘 있는 자의 판결은 비상식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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