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⑯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월미도의 빵집 중 대청과자점은 삼영제과와 광고를 나란히 냈고 최종적으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월미도 유일의 빵집이 됐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 월미도 대청과자점은 내륙의 인천정으로 주소지를 옮긴다. 인기 많은 관광지 월미도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던 대청과자점은 왜 자리를 옮겼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은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한 기나긴 중일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기 전부터 일본은 끊임없이 중국을 자극하며 전쟁을 벌여 승전국으로서 대륙진출 꿈을 달성하고 싶었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 7월에는 만보산사건이 발생했다.

중국 길림성 만보산 지역에서 발생한 중국인과 조선인의 충돌로 발화된 사건은 쌓인 감정 폭발로 이어져 인천, 평양의 중국 상인들이 죽거나 실종되는 유혈사태로 변화됐다.

만보산사건 중국내의 동향 기사.
만보산사건 중국내의 동향 기사.

결국 만보산사건의 진실은 신문 기사의 오보로 밝혀졌지만 1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조선의 화교 배척사건이었다.(사진 만보산사건 중국내의 동향 기사)

일본 경찰의 묵인과 방조로 화교 피해는 엄청났고 이는 조선내 중국 상인의 입지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앞선 글 ‘호빵과 호떡의 백년전쟁’에서 당시 청나라 상인에 대한 부정적 뉴스가 꾸준히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이해가 쉽다. 조선인의 반감은 실질적으로 일본인, 중국 상인 모두에게 있었으나 일본인은 지배자 위치에서 반감 표출 대상이 중국인을 향하도록 만들었다.

평양의 거리는 4년전年前 보다 퍽 달라젓슴니다. 새로 전차電車도 노히고 새 벽돌집도 더러 잇슴니다. 그러나 전차電車는 외국인外國人의 밥버리통이외다. 번적 번적하는 새 집들도 모다 일인日人의 것이거나 중국인中國人의 것이외다. 조선인朝鮮人 시가에는 변한 것이 업슴니다.

1923년 9월 ‘개벽’에 실린 글을 보면 외세에 개화가 이뤘으나 경제적 부를 빼앗기고 짓눌린 조선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는 글쓴이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근대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소외감은 컸고 일본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언론 통제 기술이 뛰어났던 조선총독부는 문화정책이라는 과거에 비해 세련된 방법으로 식민지 조선인 울분의 배출 통로를 조절하며 중국과 조선인의 싸움을 즐겼다. 비록 군것질 음식일지라도 문화적 상징성을 담아 감정표출의 통로가 될 수 있는데 호떡이 대표적이다.

일제강점기 호떡집은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많았고 빵집은 일본인이 다수였다. 1926년 6월 ‘동광’에 실린 글을 보면 더 명확하다.

상해上海셔 「하이카라 양복」을 입고 여긔로 여기면 호떡집 가튼 중국인의 시컴한 밥집(포반包飯집) 속으로 처음 차저 드러갈 적 가튼 창피스러온 생각은 안이낫서도

호떡은 과거나 지금이나 서민들이 즐기는 음식인 탓에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 지방의 엉터리 기자를 ‘호떡기자’라 부를 정도였고 부정적 이미지는 일반명사로 쓰일 정도의 시대적 상징성을 가졌다.

호떡집 중국 상인 배경으로 위험한 헛소문이 신문 기사로 자주 나왔고, 결국 1931년 만보산사건 오보는 엄청난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발생했다. 7월 만보산사건이 후 일본관동군은 9월에는 류타오후 사건을 조작 결국 만주를 침공했다.

일본군이 야심을 펼쳤던 그해 7월과 9월 사이인 8월 말 성업 중이던 월미도조탕 영업종료 기사가(경성일보 1931.8.31.) 있다.

월미도 피한설비 기사.
월미도 피한설비 기사.

바닷물을 덥힌 해수풀장이라 월미도조탕 영업은 통상 10월 말에 종료했으므로 1931년 8월 영업을 끝낸 것은 이례적이다.(사진 월미도 피한설비 기사)

조선총독부는 이미 만주사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중국과의 전쟁 중 후방 관광지의 활발한 모습을 자제시켰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일본군의 전쟁 승리로 1932년 3월 만주국이 세워졌고, 월미도조탕 영업은 동년 4월 개시 9월 종료됐다.

관광산업도 총독부의 결정에 따르던 시절이라 대청과자점은 정세의 불안정 속에서 조탕 영업 불투명성이 높아져 인천 내륙 이전을 결정했을 것이다.

대청과자점이 여타의 과자점과 다른 모습은 정치적 입장을 표현한 광고가 있다는 점이다. 삼영제과는 건빵을 일본군에 납품한 전범기업으로 일본 아베 전수상의 부인 집안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 삼영제과와 대청과자점 광고가 나란히 있던 점으로 보면 당연할 수 있다.

1934년 대청과자점 주소가 인천정으로 표시된 광고로 보아 1932년과 1934년 사이에 대청과자점은 인천으로 이전했다.(사진 1934년 광고, 인천본정 주소의 대청과자점)

1934년 광고, 인천본정 주소의 대청과자점.
1934년 광고, 인천본정 주소의 대청과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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