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⑰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해방 후 군산신문 1947년 12월 광고에 재밌는 이름을 가진 빵과 빵집 광고가 있다. 벙글벙글빵이 10원에 4개라는 광고가 선명한 ‘벙글벙글과방’ 빵집이다.

‘꿀팟죽’도 판매하는 벙글벙글과방은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과 학생을 위한 메뉴를 선보였고, 팥죽과 만두 광고를 낸 ‘충무제과소’라는 빵집도 있다.(사진 군산신문 충남제과소 1948년, 벙글벙글과방 1947년 광고)

군산신문 충남제과소 1948년, 벙글벙글과방 1947년 광고.
군산신문 충남제과소 1948년, 벙글벙글과방 1947년 광고.

만두는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권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지만 특히 일본인의 만두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각별하다. 해방기 충무제과소 메뉴는 과거 일본인이 많이 살던 영향이라 생각되며 군산의 특색만은 아니고 평양 등 일제강점기 활발했던 일본인 거주지 제과소 판매의 보편적 구성에 속한다.

신문광고에 정성을 들였던 벙글벙글과방이 특히 눈에 띄는데 현대의 베이커리 카페보다 다양한 제품군과 시대를 앞선 경영기법을 보여준다. 벙글벙글과방은 홍보에 적극성을 보여 현대의 바쁜 직장인과 학생을 염두에 둔 메뉴인 ‘점심특선’을 선보였다.

‘중식은 근로식빵 1인분 25원’으로 12시~2시 한정 저렴한 가격 특선메뉴를 내놓은 벙글벙글과방은 분명 시대를 앞서나갔다.(사진 벙글벙글과방 점심 광고)

벙글벙글과방 점심 광고.
벙글벙글과방 점심 광고.

벙글벙글과방이 25원에 실비 점심 서비스를 하겠다는 내용의 광고는 전혀 과장이 아니다. 당시 물가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판단이 어렵겠지만 다음에 소개할 ‘경성의 빵집’ 편에 나올 내용으로 1948년 서울의 비슷한 상품가격은 100원이었다.

항구 군산은 부두 노동자 등이 많은 특성에 비추어 빵집에서 제공하는 근로식빵 중량이 서울보다 클 가능성은 있어도 결코 작을 수 없다.

오세미나의 논문은 ‘일제시기 빵의 전래와 수용에 대한 연구’에서 이성당의 전신 이즈모야 제과소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이즈모야 제과소는 레스토랑과 커피숍 기능을 갖췄다고 밝혔는데 이는 군산 지역에 특화된 영업방식으로 보인다.

이즈모야가 일본 전통 과자를 팔던 초기부터 베이커리 카페 영업방식은 아니었고 1920년대를 지나 특히 1930년대 들어서 규모를 키워 현대적인 모습을 갖췄다.

1932년 매일신보 6월 기사에 카페만 느는 군산이라는 제목에서 보여주듯 1930년대는 서비스산업에 큰 변화가 올 정도로 군산이 들썩거린 시기였다.(사진 매일신보 1932.6.16.)

매일신보 1932.6.16.
매일신보 1932.6.16.

너도나도 한몫 챙기려 카페를 만들고 ‘유두분면(기름 바른 머리와 분 바른 얼굴)의 여급이 군산의 사나히들을 유혹’하던 1930년대 초반 군산에는 미두거래소가 들어서 큰 변화를 가져왔고 이즈모야도 이에 발맞춰 성장했다.

군산의 채만식문학관에 가면 작품 ‘탁류’와 미두거래소 내용을 시대적 배경과 함께 친절한 해설사의 설명으로 이해가 쉬우니 군산을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꼭 방문하기를 권한다.

오세미나에 따르면 1930년대 번성기 이즈모야는 조선인 직원 20명을 두고 배달 서비스를 했을 정도의 큰 제과소였다.

1910년대 군산에 정착한 이즈모야는 1920년대 초반 창업자 아들이 일본 동경 유학으로 양과자 기술을 배워 빵을 만들며 제품을 다양화했고, 가족경영 중심 이즈모야는 제과 제빵기술을 조선인 직원에게는 전수하지 않았다.

대를 잇는 가족경영의 전형적인 일본의 세습 제과소 모습으로 일본인 사업장에서 조선인의 핵심 기술 습득은 쉽지 않았다.

다른 예로 1920년대 후반 창업한 복산당福山堂은 경성에 총본점을 두고 평양, 개성, 봉천 등에 지점을 열었던 현대의 프랜차이즈 방식 제과소이다.

일본 복산현福山県 출신의 인물이 창업했다고 추정되며 현재 일본 복산현에 1920년대 경성의 제과소와 같은 이름의 온라인 홈페이지가 운영되고 있다.

복산당은 1930년대 슈크림 중독사건으로 신문을 장식했을 정도의 다양한 제품을 판매했으며, 1941년 복산당 만주 봉천지점에 지도자로 책임을 맡은 조선인 소식이 있을 정도의 인지도가 있었다.(사진 1933년 경성복산당총본점, 1941년 복산당 봉천지점 기사)

1933년 경성복산당총본점, 1941년 복산당 봉천지점 기사.
1933년 경성복산당총본점, 1941년 복산당 봉천지점 기사.

봉천지점의 강문수는 경성복산당과자본점직공부터 18년을 일했으며 9년 전 지도자로 선발 만주로 이주했다는 내용이다.

사진에 있는 기사를 자세히 보면 강문수는 창씨개명 이전의 이름이고 신문에 실릴 당시는 ‘복산 문수’로 개명한 이름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인 출신으로 기술을 전수 후 지점장이 되기 위해 그는 회사명으로 성을 바꾸는 정도의 충성도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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