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㉝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빵은 몇천 년 동안 서양의 식탁에 놓인 식문화의 중심이자 아시아 쌀 문화권의 밥과 같은 위치를 차지한다.

중국과 인도를 잇는 옛 무역로 실크로드 다큐멘터리를 보면 진흙으로 빚은 항아리 안쪽에 밀가루 반죽을 붙여 굽는 납작하고 넓은 빵으로 식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보통 1mm~1cm 두께인 ‘납작빵’(Flat Bread)은 오랜 역사가 있으며 현재 풍성하게 부푼 빵이 나오기 이전인 빵의 원형에 가까운 제조법 중 하나이다.

서양의 빵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한국, 일본, 중국 등에 납작빵과 찐빵 등이 있었으나 쌀이 주식인 생활에서 굳이 힘들게 밀가루를 만들어 국수와 납작빵 등을 먹는 일은 농한기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군산신문 1948.01.17. 중국빵 광고.
군산신문 1948.01.17. 중국빵 광고.

아시아권에서 먹는 찐빵과 납작빵 등은 빵이라는 서양식 이름이 붙기 전부터 지역마다 고유한 명칭이 있었다.

그러나 빵의 대중화가 이뤄지면서부터 비슷한 제조법을 갖는 음식들은 빵이라는 명칭에 통합돼 찐빵, 군빵, 중국빵(지나빵) 등으로 불렀다.(사진 군산신문 1948.01.17. 중국빵 광고)

특히 호떡은 중국에서 넘어와 일찍부터 서민 간식으로 토착화를 이뤘는데 1910년대 후반부터 당시 사람들에게 빵과 떡의 경계를 넘나들던 명칭의 음식이다.

1919년 3.1운동으로 대규모 조선학생과 농민 등이 체포돼 조사를 받았고, 총독부의 독립운동가에 대한 철저한 조사는 역설적일 수 있으나 다양한 직군을 포함 일상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자료의 가치도 있다.

독립운동가 유득신이 1919년 일경에 체포됐을 때 그의 부친은 경기도 고양에서 호떡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조서 내용 중 일부를 보면,

七월 중순에 조선으로 돌아온 이래 부친 밑에서 표면상 중국빵 제조를 돕고 있었으나.....
고성固城 체재 중에도 불온한 언동을 하여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떡집이라도 호떡만 만들지 않고 찐빵 등도 메뉴에 포함될 수 있어서 위의 글만으로 당시 중국빵을 호떡과 동일시한 기록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1932년 별건곤 ‘학생란學生欄’에 보면 기숙사 생활 학생들의 군것질 시간에 호떡이 주메뉴로 등장한다.

사감선생 허락맛고 외출하게 되면 각 호실에서 호떡 주문이 굉장하다. 간식은 금함으로 사감선생이 알까바 쉬-해가며 구먹뚜러진 돈을 쥐여준다. 호떡에도 여러 가지가 잇스나 우리는 그래도 군빵이 제일조타. 껍질이 누른누른 하게 익은 군빵을 뱃속에다 여어 가지고 온다.

글에서 보면 호떡의 종류가 많고 그중 군빵이라는 품목도 인기가 많았음이 확인된다. 당시 호떡의 다양한 종류도 확인 가능하다.

떠드는 소리가 왁자짓걸하며 야단법석이 난다. 또 호떡을 찻는 소리도
「꿀 느코 군 것-」
「꿀 느코 찐 것-」
「팟 느코 찐 것-」
「팟 느코 군 것-」
「늬야 아무 것도 안느코 찐 것」
이러케 제각각 외치면 물론 호떡장사 중국사람은 신이나서

이처럼 호떡의 종류는 많았고 찐빵도 호떡집 메뉴에 포함됐음을 알 수 있다. 호떡과 빵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이유는 서양 빵의 제조법이 호떡 생산에 이용된 탓이 크다.

과거 밀가루 반죽에 팥이나 꿀만 넣고 호떡을 구웠다면, 빵의 보편화와 함께 베이킹파우더를 사용해 이전 호떡보다 훨씬 부풀어 식감과 양이 풍성해지는 효과가 생겼다.

당시 사회면 기사는 호떡집에서 베이킹파우더 대신 저렴한 산업용 가성소다를 사용하는 곳이 있어 주의를 당부했다.

당시 거리에서 직접 만들어 판매된 간식으로 호떡, 빈대떡, 러시아빵 등이 있었는데 거리의 호떡 판매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 있다.(사진 매일신보 1940.3.14. 거리의 ‘호떡’장사)

매일신보 1940.3.14. 거리의 ‘호떡’장사.
매일신보 1940.3.14. 거리의 ‘호떡’장사.

사진을 자세히 보면 호떡 장수가 드럼통 위에서 호떡을 굽고 있다. 당시 호떡집에서 사용되는 연료로는 골탄이라는 기록이 있다.

골탄을 검색하면, 석유 등 탄소가 주성분인 물질을 가열해 휘발 성분을 없앤, 구멍이 많은 고체 탄소 연료, 불을 붙이기는 어려우나 발열량이 크고 연기가 없어서 가스 제조, 용광로나 주물 제조 따위에서 야금용(冶金用) 연료라고 한다.

연기가 없고 오래 가는 탄이니까 호떡을 굽는데 훌륭한 연료라는 생각이지만 갈탄 등의 사투리가 골탄일 가능성도 있다.

100년 전부터 중국빵은 군빵, 찐빵 등 다양한 형태를 포함한 용어이며 중화요리, 호떡집, 거리에서 판매됐다.

1948년 공업신문은 인천에만 중국인 빵집이 234개소로 무허가 음식점이 난립이라는 소식을 전했는데 그만큼 서민 친화적인 가격으로 인기가 많았다.(공업신문 1948.8.24. 중국인 빵집 234개)

공업신문 1948.8.24. 중국인 빵집 234개.
공업신문 1948.8.24. 중국인 빵집 234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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