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㉛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1926년 조선의 전국적 행사인 제6회 과자품평회 개회식에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참석했다.(사진 경성일보 1926.4.18. 과자품평회 개회식)

경성일보 1926.4.18. 과자품평회 개회식.
경성일보 1926.4.18. 과자품평회 개회식.

군사용 목적의 건빵을 포함한 제과산업은 군국주의 일본의 역점사업 중 하나라는 사실은 이전 글에서 충분히 설명했다.

1931년 품평회에서는 현재까지도 호두과자로 유명한 천안역 앞 과자점 ‘지촌(志村)의 호두과자 상점이 전조선 과자품평회에서 일등 금패를 받음’ 수상 뉴스가 있다.(부산일보 1931.4.12.)

전국적 행사인 과자품평회는 전국을 돌며 지방에서도 개최됐는데 경북지역 개최 시기엔 대구에서 열리는 식이었다. 전국적 규모의 과자품평회와는 별개로 대구에서는 자체적인 과자품평회를 여는 등 제과업이 활성화된 지역이었다.

대구 과자품평회 내용을 보면 조합원 50명 중 46점이 출품됐고 종류로는 생과자, 양갱羊羹, 카스텔라, 빵, 건과자 등의 다양한 제품이 전시됐다.

이렇듯 대구가 경북지역의 신문물과 과자산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당시 신문에 ‘과자 먹고 싶어 이백리 길’이라는 뉴스가 보도된다. 거창에서 아버지가 땅을 판 돈을 훔친 13세 소녀가 대구 봉산정 금판今板과자점에 거금을 들고 나타나 놀란 주인의 신고로 조사가 이뤄졌다는 내용이다.

1925년 경성일보 대구 풍월당 광고.
1925년 경성일보 대구 풍월당 광고.

대구의 여러 제과소 중 특이한 곳인 풍월당 제과소가 있다. 풍월당은 조선 전역에서 사용된 인기 상호였고 ‘대전 빵집 이야기’에서도 등장했다. 대구의 1924년 ‘풍월당제과소’ 광고와 1925년 광고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는데 제과소가 보험회사 대리점을 같이 운영했다는 점이다.(사진 1925년 경성일보 대구 풍월당 광고)

조선시보 1915.2.20. 보험금수령광고 금이백이십오원.
조선시보 1915.2.20. 보험금수령광고 금이백이십오원.

일본보험회사가 조선에 대리점을 내서 운영하는 형태였지만 조선의 보험산업은 생각보다 일찍 들어왔다. 당시의 보험업계 광고는 회사와 영업내용을 알리는 면에서 기발하고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누군가 보험금을 받으면 보험금 수령 액수를 크게 홍보하면서 회사와 화재보험, 생명보험 등의 상품 내용을 광고로 알리는 형태였다.(사진 조선시보 1915.2.20. 보험금수령광고 금이백이십오원)

보험금 수령 액수는 시간이 가면서 오백원, 천원으로 점차 올라 1920년대는 천원 넘는 액수가 보편화됐다. 대구 풍월당제과소 생명보험대리점의 주된 고객은 재정적으로 안정된 일본인이었다.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거액인 보험금 수령광고 효과 때문인지 1920년대 평양의 과자점 주인이 화재보험금을 노린 방화로 체포됐던 기사가 있다.

당시 사회면에 자주 등장했던 스스로 불을 지르고 보험금을 노린 기사는 대개 일본인이 주류를 이뤘다. 조선인은 보험이라는 체계를 이해했더라도 보험에 넣을 여윳돈이 없는 처지였다.

1927년이 되면 간이생명보험이라는 제도가 적극적으로 소개되고 소액으로 보험에 가입하는 방법이 나타났는데 이로 인해 보험산업은 폭발적인 성장과 함께 조선인 비중이 높아졌다.

대구의 과자품평회 행사와 보험업을 겸한 풍월당제과소 사례는 변화하는 시대의 시장원리를 잘 이해하고 앞선 경영기법과 감각이 있는 경영인이 제과업에 많았던 시대였음을 알려준다.

대구시보 1946.4.3. 경북과자빵공업조합.
대구시보 1946.4.3. 경북과자빵공업조합.

대구과자상조합의 조합원 대다수는 일본인이라서 조선인 조합원 규모와 영업 상황이 궁금하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유추할 수 있는 사건들이 있다. 1945년 8월 해방 후 대구 포함 경북지역 과자빵조합의 알림 글이 있다.(사진 대구시보 1946.4.3. 경북과자빵공업조합)

내용을 보면 일제강점기 일본인 제과제빵업자에게 눌려 살았던 조선인 제과업자의 설움을 말하면서 앞으로 사탕(설탕)공급에 대한 민주적 절차를 위해 조합 참가를 독려하는 내용이다. 빵이 조선인 식생활에 빠른 수용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설탕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만큼 설탕 확보는 업자에게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1939년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경성의 과자제조상 103명인 조합에서 조선인 조합원은 27명이었다. 경성의 과자상 조선인 조합원들이 대표단을 구성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설탕 공급이 줄어든 상황에서 조합원 간부 중심으로 설탕을 빼돌리고 조선인 과자상에겐 절반 이하로 공급했다는 내용이다.

조합 간부는 당연히 일본인으로 구성됐고 설탕 부족으로 인한 제과업계 피해자는 조선인 조합원에 집중됐다. 생존의 위기에 직면했던 조선인 조합원들이 진정과 고발을 했던들 행정기관 조사와 검찰의 공정한 수사가 이뤄졌겠는가.1946년 경북과자빵공업조합이 언급한 “지난 36년간 일본인 업자의 독무대 속에서 당한 고초와 탄압”은 경성의 조선인 업자의 억울함과 마찬가지이며 빙산의 일각이다.

부녀일보 1947.3.28. 국제다방 광고.
부녀일보 1947.3.28. 국제다방 광고.

1947년 국제다방 구인광고는 대구지역 제과업 발달상황을 잘 보여준다. 대구극장 입구의 국제다방은 음악, 끽다가 주된 곳인데 과자빵 기능인을 구한다는 내용의 광고이다.(사진 부녀일보 1947.3.28. 국제다방 광고)

‘경성 빵집 이야기’를 참조하면 국제다방은 대구지역 문화예술인이 모이는 품격 있는 공간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일제강점기 일본 제과업자에 눌려 조선인 업자들은 고통과 설움의 시간을 보냈으나 과자빵공업조합의 빠른 대응과 다방 광고만 보더라도 대구의 제과업계는 역동적이며 앞서가는 곳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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