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㉞ 이봉구와 오장환(1)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일제강점기 문인과 예술인들이 드나들던 카페 분위기와 여러 사연을 자세히 기록한 문인으로 개화기 카페의 역사를 쓴다면 ‘명동백작’ 이봉구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앞서 카카듀 카페 이야기 편에서도 이봉구가 초등학교 시절 이경손 영화감독을 만났던 사연을 말했다. 카카듀의 실내 모습과 신비로운 느낌의 앨리스 현을 자세히 묘사했던 이봉구의 카페 편력과 기록은 소중한 자료로 남았다.

카페 은좌銀座 대경성사진첩 1937.
카페 은좌銀座 대경성사진첩 1937.

문인과 예술인들이 자주 찾던 카페는 당시 유행했던 카페문화의 일부분일 뿐이고 전반적으로는 대규모 자본이 몰린 상업성이 강했던 분야이다.(카페 은좌銀座 대경성사진첩 1937)

경기도 안성이 고향인 이봉구는 1930년대 초반 옆집으로 이사 온 휘문고보 2학년 오장환을 만나게 된다. 학생 신분의 오장환은 대뜸 술을 마시느냐 물었고 이후 이봉구와 술과 문학으로 어울리며 1930년대 경성 카페에서 출판기념회를 하는 등 문화예술인과 많은 사연을 남겼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오장환은 술이 든 사이다병과 안주로 삶은 달걀과 빵을 담은 가방을 들고 이봉구를 찾아왔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뒷산에서 술을 마시며 오장환은 가방에서 접은 신문을 펼쳐 심훈의 시 ‘조선은 술을 먹인다’를 읊는다.

조선은 술을 먹인다

젊은 사람들의 입을 벌리고 독한 술을 들어붓는다
그네들의 마음은 화장터의 새벽과 같이 쓸쓸하고
그네들의 생활은 해수욕장의 가을처럼 공허하다
그 마음 그 생활에서 순간이라도 떠나고저 술을 마신다
아편 대신으로 죽음 대신으로 알코올을 삼킨다

가는 곳마다 양조장이요 골목마다 색주가다
카페의 의자를 부시고 술잔을 깨뜨리는 사나이가
피를 아끼지 않는 조선의 테러리스트요
파출소 문 앞에 오줌을 갈기는 주정꾼이
이 땅의 가장 용감한 반역자란 말이냐?
그렇다면 전봇대를 붙잡고 통곡하는 친구는
이 바닥의 비분을 독차지한 지사로구나

아아 조선은, 마음 약한 젊은 사람에게 술을 먹인다
뜻이 굳지 못한 청춘들의 골을 녹이려 한다
생나무에 알코올을 끼얹어 태워버리려 한다.

명동백작 이봉구가 빵과 달걀을 안주로 고향 뒷산에서 오장환과 처음 술을 마시던 때는 1932년 무렵이다. 1930년대는 시골이라도 서양식 과자와 빵 등이 읍내 장터를 중심으로 이미 보편화된 시대였다.

1929년 11월 함경도는 사탕무우를 심던 농가들이 생산단가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수매가 이뤄져 정책적으로 권장하던 사업에서 농가 피해가 막심하다는 기사가 있다.

평양에 설탕공장이 있었고 황해도와 함경도 지역의 사탕무우를 설탕 원료로 삼았으나 점차 늘어나는 수입 사탕수수와 가격 경쟁이 되지를 못했다. 20년대 후반 설탕 수요가 폭증하면서 사탕수수 중심 제당산업 개편으로 사탕무우 농가는 날벼락을 맞았다.

생산단가를 낮추며 확장된 제과산업은 농민의 도시 유입 및 산업화에 따른 식문화 변화로 설탕 소비 증가 추세와 맞물려 있었다.

이봉구가 열아홉이던 때, 안성 출신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가 감옥을 나와 고향에 머무르며 다니던 약수터에서 몇 번 이야기를 나눴던 일이 빌미가 돼 함경도 북청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뒤 옥살이를 했다.

담당은 조선인 형사였는데 이봉구의 가방속 원고에 있던 자작시를 보며 내용이 암울하고 불순하다 지적하며 쓸데없는 일에 관심 끊고 공부 아니면 연애나 하라고 조언했다.

경성일보 1934.02.22. 만주미인 긴자 진출
경성일보 1934.02.22. 만주미인 긴자 진출

이봉구의 회고는 1934년 무렵에 해당하며 일본은 물론이고 조선 전역에 퇴폐적 카페가 유행했던 상황과 부합한다.(사진 경성일보 1934.02.22. 만주미인 긴자 진출)

1931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중국을 밀어내고 만주국을 세워 승전 및 대륙진출을 자랑하던 일본은 마치 전리품을 본토 동경으로 보내듯이 “‘만주미인’들은 경성을 거쳐 오사카를 통해 동경 긴자銀座로 간다”는 기사를 상세히 내보냈다.

군국주의 일본 청장년들은 식민지와 전쟁터로 파견 또는 장기체류 상황이었고 이들을 위무하는 산업은 총독부도 밀어주는 한마디로 돈이 되는 산업이었다.

조선총독부 방침은 식민지 청년이 민족의식과 시대정신에 관심을 두기보다 일본에 복종하며 기술,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적당한 쾌락에 젖어 살기를 원했다. 1932년 경성 종로 중심으로번성했던 대형카페 수효와 여성 종사원에 대한 별건곤의 글이 있다.

종로를 중심하야 그 근방에만 잇는 카페수효만 하야도 십여곳이 되며 웨이트레스의 수효만 하야도 목단(牡丹)에 스물하나, 락원(樂園)에 쉬흔 셋, 평화(平和)에 스물넷. 이러케만 처도 그 수효가 역시 수백명이나 되니

카페 산업의 핵심 인력이던 여급 숫자만 보아도 1930년대 경성의 향락산업 규모가 엄청났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진 ‘은령‘의 여성종업원과 내부 대경성사진첩)

‘은령‘의 여성종업원과 내부 대경성사진첩.
‘은령‘의 여성종업원과 내부 대경성사진첩.

’100년 전 빵 이야기‘ 연재를 마치며

문인들의 빵과 카페 이야기 두 편으로 연재를 마칠 예정이다. 오래전 하인리히 E. 야곱 ’빵의 역사‘를 재밌게 읽은 후 관련 서적을 찾아 도서관을 다니던 때가 생각난다.

대개는 빵을 분류하고 제조하는 내용이 많았으나 일본의 경우 빵, 커피만을 주제로 수필이나 시집 등 다양한 형태로 출간된 책들이 있었다.

우리나라도 빵이 식문화 속에 수용, 정착되는 과정에서 여러 경쟁 식품과 과제들이 있었을 것인데 이를 극복하며 대중화가 이뤄지는 힘은 어디에 있었을까 궁금했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개인적 궁금증을 풀어주는 책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빵을 주제로 다양한 책을 읽으면서 내가 써보고 싶다는 충동도 가끔 나타났다.

비영리법인 꿈베이커리 이사 활동을 하면서 홈페이지에 올릴 ’빵 이야기‘ 십여 편을 써놓고 차츰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해서 여기까지 왔다.

연재 글에 넣지 못한 다소 딱딱하고 전문적일 수 있는 자료를 포함 단행본으로 만들 예정이다. 부족함이 많은 글이지만 지금까지 읽어주고 관심을 보여준 독자에게 감사드리며 <인천투데이>의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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