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기관 목적 상실한 부정부패 온상
서원 47곳만 남기고 600여곳 폐지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53년 전인 1871년 5월 9일 고종(1852~1919, 향년 66세)의 아버지이자 조선의 비운의 개혁가 흥선대원군 이하응(1821~1898, 향년 77세)이 서원 철폐 명령을 내렸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어린 고종을 대신해 1864년부터 1873년까지 섭정을 했다. 섭정 기간 동안 그는 구한말 격동의 시기를 마주하며 조선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려 했다.

흥선대원군 사진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캡쳐)
흥선대원군 사진 (사진제공 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캡쳐)

그는 당시 최고 권력기구이자 세도정치를 비롯한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비변사(임진왜란 때 설치된 임시기구)를 폐지했다.

또한, 삼정의 문란(전정, 군정, 환곡 등 국가 재정 수입 3가지)을 바로잡고자 토지 조사 사업, 양반과 평민의 동일 세금 징수, 민간에 곡식 저장 후 대여 등 해법을 제시해 실시했다.

향촌사회 부정부패의 온상지, 서원 철폐

아울러 흥선대원군은 서원 600여곳을 남기고 단 47곳만을 남기며 대대적인 서원 철폐를 실시했다.

당시 서원은 본래 교육기관이라는 목적과 기능을 상실하고 세도정치 시기 부정부패의 거점으로 전락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향촌사회 유교적 질서를 이끌던 서원은 지역 사회 부패 세력으로 변질돼 일반 백성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기 일쑤였고 극단적인 붕당 당파싸움의 원흉이었다.

특히, 부정부패가 극심했던 대표적인 서원 만동묘(萬東廟, 충북 괴산)는 17세기 중반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왜군과 싸운 명나라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서원이었다.

이 만동묘의 건립자는 조선 후기 정치가이자 유학자 송시열(1607~1689, 향년 81세)의 제자 권성하(1852~1914, 향년 62세)이다.

당시 만동묘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다. 만동묘를 거점으로 삼은 부패 세력들은 만동묘 중수를 핑계로 자신들의 지역을 넘어서 경북 상주의 승려들을 대상으로 징발하기도 했다.

이에 충청도 관찰사에서 이들을 구금하려 하자 도리어 상소를 올리고 항의를 하는 등 그 위세가 대단했다.

개혁가 흥선대원군은 1865년 만동묘 철폐 선언을 했다. 지역 유생들은 항소를 올리고 결사반대했으나, 흥선대원군은 단호했다.

흥선대원군은 부정부패의 일삼는 대표적인 서원 만동묘를 본보기로 시작해 대대적으로 서원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그는 서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고을의 수령에게 서원 원장을 맡게 했다. 이로써 서원을 향한 중앙정부의 통제를 강화했고 향촌 사회 지배자로 군림했던 서원은 힘을 쓰지 못하게 됐다.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당시 서원 600여곳이 철폐되고 단 47곳만이 남았다. 지역별로 남은 서원은 경기도 12, 충청도 5, 전라도 3, 경상도 14, 강원도 3, 황해도 4, 평안도 5, 함경도 1곳이었다.

이러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향촌사회에서 발생하는 부정부패를 뿌리 뽑아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와 극심한 당파싸움을 타파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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