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국모’ 아닌 외세 침략의 원흉, 민비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58년 전인 1866년 4월 20일 흥선대원군 이하응((이하응, 1821~1898, 향년 77세)이 민비(1851~1895, 향년 43세, 이자영)를 고종(1852~1919, 향년 향년 66세)의 왕비로 들였다. 그때 민비 나이는 16세였다.

흥선대원군은 민비를 선택한 후 자신이 직접 민비에게 왕의 신부로서 갖추어야 할 덕목을 직접 가르쳤다. 이는 조선 개국 이후부터 꾸준히 문제가 됐던 외척의 득세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울 종로구 운현궁에 있는 명성황후 표준 어진.
서울 종로구 운현궁에 있는 명성황후 표준 어진.

민비는 ‘조선의 국모’라고 미디어가 포장한 이면과 다르게 그가 자행한 지나친 국정 개입, 혈세 낭비 그리고 열강을 마구잡이로 끌어들인 국제관계 처세술은 구한말 조선을 파탄 직전까지 몰고 갔다.

아울러, 민비의 이러한 행동으로 여흥민씨 외척 세력들이 득세해 나라는 더욱 혼란스러웠다.

민비는 약관(20살)을 넘기자 당시 고종을 대신해 섭정하던 흥선대원군을 내쫓고자 했다. 1873년 민비는 최익현(1834~1907, 향년 72세)에게 고종이 국정을 운영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리게 했다.

이를 향한 당시 유생들의 강력한 지지와 고종 역시 상소문 내용에 동의하자 흥선대원군은 10년만에(1863~1873) 하야하게 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민비를 비롯한 민씨 세력, 고종이 정권을 잡았다.

무분별하게 열강들을 끌어들인 민비 

민비는 당시 민승호(1834~1874, 향년 44세), 민규호(1836~1878, 향년 42세), 민겸호(1838~1882, 향년 44세), 민태호(1834~1884, 향년 50세), 민명익(1860~1914, 향년 54세), 등 민씨 세력 일파가 국정 요직을 맡게 해 고종 재위 시기 민씨 외척 가문이 득세하게 했다.

다시 한 번 세도 정치라는 정치 폐단이 부활했고, 조정은 제대로 운영될 리 없었다. 온갖 민씨 세력은 온갖 부정부패로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고 흥청망청 쓰며 백성을 힘들게 했다.

특히, 1882년 신식군대와 구식군대의 노골적인 차별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민비는 청나라를 끌어들여 이를 진압했다. 당시 난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은 13개월 동안 녹봉을 받지 못했고 이에 외척 세력 정점에 있었던 민비를 죽이고자 했다.

청나라의 지원으로 임오군란 진압 이후 청나라는 이 대가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을 체결한다. 이는 두 나라의 수륙 양면을 포함한 통상에 관한 규정을 정한 조약이었다.

그러나 치외법권 조항 등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으로 청나라 상인들이 대거 조선에 유입돼 조선을 속국화 하려는 청나라의 의도가 담겨 있어 청나라의 경제침탈이 가속화됐다.

또한, 청나라 상인들이 조선 내륙으로 진출하자 일제 역시 1883년 조일통상장정을 요구하자 고종과 민비는 조선 내륙 통상을 일본인 상인에게도 허용해 줬다.

민비의 국정 개입에 따른 청나라와 일본은 사로 조선을 삼키로 했고, 조선은 외세들의 식민지 경제 수탈 무대이자, 열강의 힘겨루기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민비의 실책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로 촉발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또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로 인해 청나라 군은 조선에 들어왔고,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일제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들어오면 일본 군도 들어간다는 조약에 따라 역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했다. 그렇게 조선 땅은 민비가 끌어들인 열강들로 인해 전쟁터가 됐고 동학농민군들은 외세와 자신들의 조정에 의해 학살당했다.

드라마가 만든 '조선의 국모'

미디어(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가 만든 ‘조선의 국모’라는 민비의 이미지와 달리 그는 누구보다 조선 백성을 힘들게 했다. 자신의 권력을 위해 외세를 끌어들이고 이 외세의 힘을 빌려 조선 백성을 죽였다. 또 그의 실정으로 인해 조선은 전쟁터가 돼 국가를 황폐화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1895년 을비사변으로 일제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됐다. 이 때문인지 ‘일제에 맞선 조선의 국모’라는 이미지로 역사의 이면과는 다르게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일제가 잔악하게 조선의 왕후를 시해한 것은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만행인 것과 별개로, ‘미디어의 포장’으로 인한 민비의 실정은 올바른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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