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경기 일대서 수해 발생하자 북한, 구호물픔 제공 제의
정치와 인도주의 교차한 역사적 순간, 짧았던 화해 분위기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0년 전인 1984년 9월 29일, 북한이 수해가 발생한 남측을 돕기 위해 구호물품을 제공했다. 이는 남북관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1984년 8월 말, 서울과 경기 일원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져 사상자 190명과 재산 피해 1300억원 이상이 발생했다. 이런 상황에서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회가 뜻밖에도 남측 이재민에게 구호물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북한으로부터 들어온 쌀을 옮기고 있는 모습 (사진출처 KTV 국민방송 유튜브 갈무리)
북한으로부터 들어온 쌀을 옮기고 있는 모습 (사진출처 KTV 국민방송 유튜브 갈무리)

정치적 계산과 인도주의의 교차

북한의 제안은 사실 같은 해 8월 20일 대한민국 정부의 대북 물자 지원 제의에 대응하려 한 성격이 강했다.

먼저 남측 정부는 남북한 경제분야 공동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 남북 간 교역과 경제협력을 제의하며, 북한 주민의 생활 향상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물자를 무상으로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북한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남측 정부는 북측의 제의를 남북대화 돌파구로 삼고자 수락했다. 당시 남북관계는 적대적 상황에 있었기에 북측은 남측이 선뜻 구호물품 지원 제의를 수락하자 구호물품을 마련하는 데 애를 먹었다.

9월 29일 아침, 북측 인원 826명이 처음으로 휴전선을 넘어 판문점으로 들어왔다. 같은 날 강원도 북평항과 다음 날 인천항에도 쌀 7200톤, 옷감(천) 50만m, 시멘트 10만톤, 의약품 14종 등 570만달러 상당의 구호물품이 도착했다.

남북관계의 새로운 전기

비록 정치적 고려가 컸지만, 이 사건은 막혔던 남북대화에 물꼬를 텄다. 8년 만에 남북 직통전화가 재가동됐고, 이를 계기로 남측은 북측에 남북적십자회담, 남북체육회담, 남북경제회담 등을 제안했다.

북한 역시 한국 정부 제안에 화답해 1984년 11월부터 남북경제회담 등 다양한 남북대화가 이어졌고, 1985년 9월에는 사상 처음으로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을 실시해 남북 평화 분위기가 형성됐다.

짧았던 화해의 봄

그러나 이 화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1986년 1월 20일, 북한이 모든 남북대화를 일방적으로 중단하면서 새롭게 형성된 남북관계는 다시 경색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북한의 대남 구호물품 지원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북 간 대화와 교류 가능성을 보여준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는 향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의 초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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