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㉔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비스킷(Biscuits)은 두 번 구웠다는 뜻을 가진 식품이다. 빵을 두 번 구워 습기가 제거돼 보존성이 뛰어난 비스킷은 과거 유럽 뱃사람들 식량으로 애용됐다.

포르투갈 뱃사람 식량 비스킷을 접한 전국시대 일본에서 전투식량의 가치를 알아보고 도입, 점차 일본 식문화에 빵이 정착되는 계기가 됐다.

네덜란드에서 발달한 쿠키는 초콜릿과 건포도 등이 추가돼 통상 두껍고 쫀득한 질감이나 바삭함을 가졌다면 비스킷은 영국과 유럽에서 발달했고 쿠키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얇으며 빵의 질감에 가깝다.

개화기 빵을 지칭하는 단어도 면보, 팡 등 심지어 뿌레드라는 용어까지 다양하게 사용됐던 것처럼 비스킷 역시 맛본 사람도 적고 생활 속에 정착되는 과정도 길었다. 1929년 1월 별건곤에 실린 글에는 왜떡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상자에 왜떡으로 맨든 조고만 인주(印朱)함 가튼 것을 꺼내더니 거긔다 아이스크림을 떠담고 그 위에 과자뚜겅을 덥허다가 준다. 별다른 것이 안이다. 요새 서울서 아이스크림 담어 파는 곡갈가튼 나팔가튼 왜떡...

별건곤에 나온 왜떡을 보면 현대인이 먹는 ‘모나카’라는 과자와 부라보콘 또는 월드콘으로 익숙한 아이스크림을 감싼 과자껍질 형태까지 총칭해서 왜떡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스킷 역시 마찬가지로 왜떡에 포함됐다. 다른 기록도 살펴봤을 때 1920년대 왜떡은 빵, 서양과자, 일본식 과자 등을 총망라하는 용어로도 사용했다.

해외에서 들어온 신기한 물건을 몽땅 박래품(舶來品 주로 서양에서 배에 실려 들어온 신식 물품) 한 단어로 총칭한 경우와 비슷하다.

떡도 근래에 호떡, 왜떡, 로서아빵 그 타他 과자菓子 등속等屬이 생긴 뒤로 전일前日보다 수요자需用者가 적어진 까닭에 떡집이 적어지고 떡의 종류도 줄어 간다.

위의 글 별건곤 1929년 9월호에서는 조선 떡의 전통문화가 밀려오는 외래 식문화와 경쟁 구도 속에 쇠퇴하는 현실을 지적한 글이라 종류마다 조선에 인접한 국가를 대표하는 형식의 단어를 사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처음 접했던 개별 식품의 정확한 명칭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온 물품인지가 더 궁금했었던 모양이다.

매일신보 1938.12.6. 비스켓 감별법.
매일신보 1938.12.6. 비스켓 감별법.

1938년 매일신보 ‘비스켓 감별법’ 기사를 보면 밀가루가 아닌 전분 가루에 설탕, 버터를 섞어 만든다고 했다.(사진 매일신보 1938.12.6. 비스켓 감별법)

또한 가짜에는 10% 정도의 도자기 흙을 섞어 만든 제품이 있어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했다. 이로 미뤄보면 30년대 후반에 이르면 비스킷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졌고, 비스킷은 상당히 딱딱한 식감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미군정이 들어섰던 1940년대 후반이 되면 직수입된 비스킷이 들어와 과거 2~30년대 질감과는 확연히 다른 바삭한 식감의 비스킷이 보편화됐다.

1948년 기사를 보면 서울 명동거리에서 비스킷을 파는 여성들이 많아 부인신보는 인터뷰를 통해 춥고 궂은날을 가리지 않고 비스킷 파는 여인들의 애환을 보도했다.(사진 부인신보 1948.6.13.)

40년대 후반 시민들에게 익숙해진 배경에는 해방 후 식량난 해결을 위한 원조 물량에 비스킷이 포함돼 저소득층 위주의 배급도 이뤄져 남녀노소가 두루 맛을 보게 됐기 때문이다.

워낙 식량난 문제가 심했던 시기라 비스킷 배급에도 부패한 권력층과 모리배의 개입으로 비리가 생겨 떠들썩한 사회문제가 됐고, 먹어보지 못한 사람도 떠들썩한 비스킷 뉴스로 친숙해진 시절이기도 했다.

부인신보 1948.6.13.
부인신보 1948.6.13.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