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㉓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샌드위치를 만들 때 사용하는 식빵은 처음부터 적당한 크기로 절단된 상태의 빵으로 판매되지 않고 소비가 통으로 사서 각 가정에서 자르는 형태였다.

1928년 미국에서 로웨더가 최초의 식빵절단기를 선보였고 이후 인기를 얻어 1930년대 미국 전역에서 적당한 크기로 잘린 빵(sliced bread) 판매가 보편화됐다.

1930년대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는 식빵이 아직 통으로 판매됐고 직접 잘라 먹어야만 했다. 따라서 신문에서는 빵을 얇게 자를 방법을 알려줬는데 뜨거운 물을 준비해 칼을 뜨겁게 만든 후에 빵을 자르면 얇고 곱게 잘린다는 생활의 지혜를 기사로 냈다.

아울러 식빵과 다양한 재료로 샌드위치를 만드는 방법도 소개한다.(사진 중외일보 1930.3.29. 쌘드위치 맨드는 법)

중외일보 1930.3.29. 쌘드위치 맨드는 법
중외일보 1930.3.29. 쌘드위치 맨드는 법

1930년 중외일보는 귤껍질 샌드위치, 딸기 샌드위치, 멘치 샌드위치, 생선 샌드위치 네 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명칭을 보면 샌드위치 종류를 짐작할 수 있으나 멘치 샌드위치는 낯선 메뉴이다. 멘치는 일어로 ‘잘게 썬 고기’로 영어 mince에서 온 단어이다.

전편에서 소개한 소나 돼지의 간으로 만드는 레바 샌드위치가 1940년대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해지면서 나타난 메뉴임을 설명했다. 1930년대 멘치 샌드위치는 도야지나 소고기를 준비하고 양파(다마네기) 반개, 버터(빠다), 우유, 후추, 빵 등의 풍성한 재료로 만드는 법을 소개했다.

1930년대와 40년대는 필수품인 식료품 공급 상황에 확실한 차이가 있다. 비록 1930년대에 상대적 풍요가 있었더라도 일본인을 비롯한 일부 계층만이 부를 누렸던 상황이라 신문에서는 일반 서민을 위한 메뉴로 귤껍질 샌드위치를 소개했다.

현대인도 귤차, 유자차를 마시므로 귤껍질을 못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귤껍질을 샌드위치 재료로 사용한다는 발상은 의외이다.

만드는 방법을 보면 귤 다섯 개 분량 껍질을 모아 껍질 안쪽의 하얀 부분을 제거 빨간 부분을 모아 맑은 물에 씻어 설탕과 함께 냄비에 끓이면 훌륭한 귤잼이 돼 식빵에 바른 뒤에 먹는 설명이다.

문학에 표현된 내용을 살피면 당시 사람들도 귤껍질을 일상적으로 먹지는 않았다. 귤껍질을 먹는 장면은 1925년 발표 최서해의 탈출기에 있다.

이틀 사흘 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이틀이나 굶고 일자리를 찾다가 집으로 들어가니 부엌 앞에서 아내가(아내는 이때에 아이를 배어서 배가 남산만하였다) 무엇을 먹다가 깜짝 놀란다. 그리고 손에 쥐었던 것을 얼른 아궁이에 집어넣는다. 이때 불쾌한 감정이 내 가슴에 떠올랐다.

‘.......무얼 먹을까? 어디서 무엇을 얻었을까? 무엇이길래 어머니와 나 몰래 먹누? 아! 여편네란 그런 것이로구나! 아니, 그러나 설마……, 그래도 무엇을 먹던데……’

나는 이렇게 아내를 의심도 하고 원망도 하고 밉게도 생각하였다. 아내는 아무런 말없이 어색하게 머리를 숙이고 앉아 씩씩하다가 밖으로 나간다. 그 얼굴은 좀 붉었다.

아내가 나간 뒤에 아내가 먹다 던진 것을 찾으려고 아궁이를 뒤지었다. 싸늘하게 식은 재를 막대기로 뒤져내니 벌건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을 집었다. 그것은 귤껍질이다. 거기는 베어 먹은 잇자국이 났다. 귤껍질을 쥔 나의 손은 떨리고 잇자국을 보는 내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탈출기는 만주에서 혹독한 고생을 하던 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위의 내용을 보면 아무리 배가 고플지라도 귤껍질을 그냥 먹기는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1927년 발표된 정지용의 시 ‘압천’에는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이 표현됐다. ‘압천’은 정지용이 모교 휘문고보의 지원으로 일본 도시샤대학에 유학 중이던 시기 발표됐다.

시는 전반적인 슬픔이 짙게 깔린 내용으로 됐으며, 정지용은 유학 중 만난 조선인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에 공감하는 수필을 소상하게 썼던 시인이다. 만주에서 귤껍질을 먹는 굶주린 가족의 처지와 일본에서 오렌지 껍질을 씹는 조선인 유학생의 생활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다만 정지용의 시에 나타난 나라를 잃은 식민지 조선인 유학생의 처지로 나그네 상황이 오렌지 껍질을 씹는 쓰라린 심정 비유에 눈길이 간다. 귤, 오렌지 껍질 모두 시고 쓴 맛의 웬만해선 먹을 수 없고 버리는 과일 껍질이다.

1932년 과일값을 보면 사과 두 알에 10전 바나나 20전(20개) 정도의 가격이다. 당시 10전의 가치는 커다란 빈대떡 두 장, 경성 카페의 커피 한 잔 값이다.

매일신보 1940.7.13. 바나나가 싸졌다 기사
매일신보 1940.7.13. 바나나가 싸졌다 기사

계절과 무관하게 다양한 과일을 먹을 수 있는 현대와 달리 과일 생산량이 많지는 않았던지 과일값은 저렴한 편이 아니었다. 의외인 점은 수입품인 바나나 가격은 높지 않았다.(사진 매일신보 1940.7.13. 바나나가 싸졌다 기사)

낮은 산지 가격과 배로 대량 운반되는 푸른 바나나가 출발 유통 과정에서 노랗게 익어 팔게 되는 특성의 과일이라 가능했다.

귤껍질 샌드위치는 버려질 껍질과 설탕을 활용해 만든 비교적 저렴한 서민용 과일잼 샌드위치 메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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