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㉕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식빵의 이름에는 특이한 점이 있다. 먹는 빵이라는 뜻의 식食빵인데 굳이 먹는 음식에 사족과 같은 이름이 붙었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예전에 연필로 쓴 글을 지우는 용도로 쓰인 빵이 있었고, 이와 구별된 식용의 빵을 지칭했다는 가설이 하나이다. 또 하나는 비스킷이나 간식용 빵과 구별된 식사용으로, 주식主食용 빵에서 단순화된 단어로 식빵이 됐다는 설이다.

두 가지 설을 검증하기 위해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어느 쪽이 설득력을 갖고 있을지 살펴보겠다.

식빵.(인천투데이 자료사진)
식빵.(인천투데이 자료사진)

100년 전 학생들이 사용하는 연필은 한쪽 끝에 고무지우개가 달린 형태가 아니어서 현대의 미술 시간 목탄화 그림에서 지우개 용도로 식빵이 사용되듯이 예전에는 지우는 일로 빵이 필요했을까.

과거 학생들이 사용했던 연필 형태를 짐작할 내용으로 동아일보(1931.01.6.)에 발표된 어린이의 동시가 있다.

고무 박은 은銀갓을 꽉 눌러쓰고
샛밝안 두루막은 곱게 입어도

날적부터 외다리로 서진 못하고
밤낮없이 내주머니 타고 다녀요

보아도 보고시퍼 연필서방님
어제밤 손을 너허 찾아봤더니

어엿븐 내 연필은 간곳이 없고
주머니 가마밑만 구멍이 낫소

감맊에 오뚝앉아 우는 저새야
너도너도 내 연필은 보지 못했늬

어데서 덜덜떨며 울며 누엇나
그리워 하로종일 눈물만 나요

1930년 동아일보에 기고 1931년 새해 발표됐던 이일승 학생의 ‘연필을 일코’라는 작품이다. 당시 연필에 달린 고무지우개는 인도에서 수입한 고무로 만들어서 ‘인도고’라고 불렀다.

현대 연필과의 차이점은 고무지우개가 커서 갓을 쓴 모양으로 비유가 가능한, 즉 지우개가 연필 폭보다 넓은 형태였다.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당시의 어린이가 연필을 삼켰는데 ‘인도고’가 목에 걸려 기도를 막아 질식사한 뉴스가 있는 점을 참조하면 연필의 형태가 짐작된다.

예전 연필에 지우개가 달려있어도 빵이 훨씬 지우개 역할을 잘 수행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1920~30년대 일본 유학했던 조선 학생의 회상기에 식빵의 딱딱한 테두리만 잘라 폐기될 부스러기를 1전을 주고 사면 하루의 식량이 됐다는 내용이 있다.

1910년대에도 샌드위치는 기차역에서 15전 가격의 도시락으로 판매됐는데 식빵의 딱딱한 테두리는 잘라내고 만들었던 모양이다. 특별히 미술작품이나 섬세한 설계도면을 그리는 작업이 아니고서는 일반인이 빵을 지우개로 쓴다는 생각은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무리한 상상이다. 따라서 지우개용과 먹는 용도의 빵으로 이름 붙여진 가설은 근거가 약하다.

이전 글 비스킷 이야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전국시대 일본은 전쟁기 비상식량 용도로의 가치를 알아보고 보존성이 뛰어난 건빵을 개발했고 이후 산업화로 탄탄한 보급체계를 갖췄다.

일본에서 일반인이 빵에 친숙해진 시기는 단팥빵 인기가 높아져 도쿄 긴자에서 줄을 서 사갈 정도였다는 식문화 변천과 관계가 깊다. 1920년대 일본을 여행한 조선인의 기록을 보면 여관의 아침 식사로도 식빵이 제공됐다.

오사카大阪시하고도 한복판에서 况且(하물며의 뜻) 백주에 곰팡이 낀 팡을 판다. 아무러나 노상에서 다 먹어버럿다....

조반 먹을 문제에 관하야 여러 파로 난호엿다. 메시야(식당)로 가기로 하는 파. 사다 먹기로 하는 파. 그냥 숙박소 식팡 주인 집에서 먹기로 하는 파

매일신보 1936.2.17. 식팡이야기.
매일신보 1936.2.17. 식팡이야기.

1926년 잡지 동광에 실린 ‘방랑의 일편一片’의 글에서 식빵과 관련된 일본 식문화 변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1920~30년대 신문과 잡지를 보면 식빵은 이미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사진 매일신보 1936.2.17. 식팡이야기)

일본 본토를 떠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외국에서 치러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승리 과정에서 건빵은 군사용 식량으로 충분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식빵은 일본 정부가 관심을 뒀던 장기 보존 군용건빵과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간식용 빵과 구별되는 식사용 목적의 이름에서 기원했다는 가설이 설득력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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