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㉖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조선에 빵과 양과자가 빠르게 정착되는 과정에서 설탕은 결정적 역할을 했다. 100년 전 자연에서 채집한 꿀을 평범한 가정 부엌에 두고 요리에 넣는다거나 한과를 만들어 먹는 일은 그저 동화 속 이야기다.

쌀밥에 고깃국 먹는 일도 명절이나 돼야 가능했던 시절이라 군것질은 자연에서 얻은 군밤이나 고구마가 일상이라 비록 자연에서 얻는 과일이나 손이 많이 가는 곶감의 단맛도 귀한 선물로 쓰였다. 따라서 설탕이 첨가된 과자를 처음 맛본 사람들이 받은 충격은 대단했다.

사탕무우 출처 PNGEgg 이미지.
사탕무우 출처 PNGEgg 이미지.

1920년대 신문 기사 이야기로 예를 들면, 경남 거창의 어린 소녀가 대구의 한 제과소를 찾아와 거액권을 내고 과자를 샀다. 수상히 여긴 주인은 경찰에 신고했고, 소녀는 과자가 먹고 싶어 아버지가 땅을 팔고 받은 돈을 몽땅 훔쳐 대구까지 왔다는 내용이다.

아마 어느 특별한 날 아버지가 거창 소녀를 데리고 대구에 왔을 때 사준 달콤한 과자를 꿈에도 잊지 못해 벌어진 사건이라 생각한다. 교통망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인 만큼 소녀가 이동한 시간과 거리는 상당했을 것이다.

조선의 설탕 제조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해방 직후 소련민정청이 조사한 ‘북조선의 경공업’이라는 보고서에 의하면 1920년 일본회사가 “평양에 하루 최대 600톤의 사탕무를 처리해 최대 10톤의 설탕을 생산할 수 있는 제당공장을 건설하였다”라고 기록했다.

일반적으로 사탕수수를 가공 설탕을 만든다고 알고 있으나 사탕무우도 설탕의 주요 원료이다.(사진 사탕무우 출처 PNGEgg 이미지)

조선은행회사요록朝鮮銀行會社要錄(1921년판) 기록을 보면 평안남도 대동군 대동강면 선교리에 대일본제당大日本製糖(株) 지점이 있었다. 제당회사인 일본 본점은 1895년 설립됐다.

1918년 매일신보에 ‘첨채재배개시’라는 기사가 있다. 사탕무우(첨채甛菜)를 평양에서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러시아에서 미국으로 보낸 종자를 수입해서 평양 외곽에 재배를 시작했고 그해 생산된 사탕무우는 설탕을 만들지 않고 모두 종자로 활용 재배지역을 늘릴 예정이라는 내용이다.

러시아 사탕무우 종자가 미국으로 보내져 일본으로 수입됐다는 말은 미국의 기술로 종자개량이 이뤄졌다는 내용이라 생각한다. 미대륙이 발견되고 유럽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가져갔던 밀 종자는 기후 및 풍토가 맞지 않아서 초창기 재배에 실패했다.

초창기 이주자는 풍부한 옥수수 농사에 의존해 옥수수로 만든 빵을 먹어야 했다. 이후 개량된 밀 재배에 성공한 종자개량 기술로 러시아 사탕무우도 개량이 이뤄져 일본회사가 황해도와 평안남도 일대에서 재배 설탕을 생산했다는 생각이다.(사진 매일신보 1918.3.10. 첨채재배개시)

매일신보 1918.3.10. 첨채재배개시.
매일신보 1918.3.10. 첨채재배개시.

당시 러시아와 일본의 사이가 좋지 않아 정상 무역이 어려워서 단순하게 미국을 통한 사탕무우 종자 중계무역일 가능성 또한 있다.

1920년 이후 평양의 제당회사는 사탕무우를 원료로 설탕 생산을 지속했으나 1930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공장은 1930년까지 운영되었으나 조선에서 사탕무의 수확량이 감소함에 따라 설탕의 원가가 상승하게 되자 가동을 중단하였다. 바로 이 해에 공장은 다시 설비를 갖추고 일본 및 자바(Java)에서 수입한 사탕수수-원료 정제를 시작하였다. 재설비 이후 공장은 하루 최대 180톤의 원료를 정제하였다.

매일신보 1918.3.10. 첨채재배개시.
매일신보 1918.3.10. 첨채재배개시.

위의 소련민정청 기록은 사탕무우를 원료로 만들던 설탕 제조시설을 사탕수수 원료 생산체제로 변화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1920년대부터 꾸준히 늘어가던 설탕 수요를 현지 생산 사탕무우 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고 채산성도 떨어져 나타난 변화였다.

1931년 동아일보에 ‘사탕소비세 경감’ 기사가 있다.(사진 동아일보 1931.12.31. ‘설탕갑 싸진다’ 기사) 평양의 제당설비 개편은 무역환경 변화로 사탕수수 수급이 원활해지고 증가한 설탕 수요에 세금체계 개편까지 복합적으로 맞물려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1920년대 후반부터 경성에 초콜릿, 과자 등을 먹을 수 있는 명치제과 등 베이커리 카페가 들어섰던 이전 설명 글을 참조하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1945년 해방 후 남북으로 나뉘었고 대규모 설탕공장이 평양에 있으니 남한지역은 설탕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다. 1946년 1월 자유신문은 “말로만 준다는 설탕배급이 정말 나온다”는 기사를 전했다.(사진 자유신문 1946.1.16. 설탕 배급)

이후로도 오랜 시간 설탕 공급은 원활하지 못해 사카린 파동 등 커다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마치 거창의 어린 소녀가 한걸음에 대구로 달려와 과자를 찾았던 것처럼 설탕 맛에 한 번 길들인 사람은 벗어나기가 몹시도 어려운 모양이다.

자유신문 1946.1.16. 설탕 배급.
자유신문 1946.1.16. 설탕 배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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