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북측에 방문한 김구와 김규식
남북 각자 단독 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이승만·김일성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76년 전인 1948년 4월 23일 남북 주요 인사인 김구(1876~1949, 향년 72세)와 김규식(1881~1950, 향년 69세), 김일성(1912~1994, 향년 82세), 김두봉(1889~사망연도 미상)이 남북연석회의 결의문을 발표했다.

남북연석회의란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참여해 남북 분단과 남북한 단독정부 수립 등의 문제를 논의하던 의사 결정 협의체다. 회의는 북측이 제안해 1948년 4월 19일~23일 평양에서 열렸다. 남측 김구와 김규식 선생은 분단 만큼은 막아야 한다며 평양 방문 길에 올랐다. 

해방 이후 통일 정부 수립 핵심 인사였던 김구 (사진출처 KBS 역사저널그날 유튜브 캡쳐)
해방 이후 통일 정부 수립 핵심 인사였던 김구 (사진출처 KBS 역사저널그날 유튜브 캡쳐)

당시 시대적 상황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과 북 양측에 각각 단독 정부가 들어설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한반도 분단은 사실상 확정된 상태였다.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열린 미소공동위원회(1차 1946, 2차 1947)가 열렸다. 그러나 정부 수립을 위해 협의할 정당과 사회단체 선택 문제를 두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또한, 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당시 훗날 한국의 독재자가 되는 이승만(1875~1965, 향년 90세)은 ‘정읍발언(1946년 6월 전북 정읍에서 남측 단독 정부 수립 촉구)’으로 남측만의 단독 선거를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1947년 10월 유엔 총회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유엔 총회는 소련의 불참 속에(찬성 41, 반대 0, 기권 4)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 파견을 결의했다.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위원단이 1948년 1월 7일 한국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도 지명됐으나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함으로써 유엔 총회가 결의한 남북한 전체 선거는 무산됐다. 위원단은 선거를 남한에서만 실시할 것인가를 심의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중국(당시 중화민국)·필리핀·엘살바도르·프랑스는 단독 선거라도 실시하자고 주장했고, 호주·캐나다·인도·시리아 대표는 반대했다. 결국 위원단은 독자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유엔 총회에 자문을 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격론 끝에 소련 등 사회주의 진영 11개국이 불참하고 11개국이 기권한 상태에서, 31개국(캐나다·호주 제외)의 찬성으로 위원단이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위원단은 논란 끝에 1948년 5월 10일 남측 단독선거안을 찬성 4, 반대 2(호주·캐나다), 기권 2(인도·프랑스)로 가결했다. 캐나다와 호주는 극우단체를 제외한 한국 내의 모든 정당이 선거를 보이콧하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선거안을 반대했다.

김규식 선생.
김규식 선생.(출처 위키백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아울러 북한 역시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내부적으로 헌법 초안 마련, 인민군 창설, 주요 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에 바탕을 둔 독자 정부 수립을 진행 중이었다.

북측은 1947년 12월 작성한 임시헌법초안을 1948년 2월 6일과 7일 이틀 동안 열린 인민회의에 제출했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북측은 이렇듯 독자 정권을 수립하면서도 통일 정부 수립을 주창하던 남북한 주요 인사들에게 남북연석회의를 제시했다.

그렇게 1948년 4월 19일, 남측의 김구와 김규식 선생 등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평양길에 올랐다.

북측에선 김일성, 김두봉 등이 참가해 결의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외국군대의 철수’,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을 주창하는 결의문 발표였을뿐,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질서와 정치지형은 실질적인 한반도 통일 정부 수립 논의가 연석회의에서 이뤄질 수 없는 구조였다. 김구 선생과 김규식 선생의 발걸음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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