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순국 107주기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7년 전인 1917년 4월 22일 대한제국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에 보낸 고종의 특사 중 한 명 이던 독립운동가 이상설(1871~1917, 향년 46세) 선생이 순국했다.

이상설 열사는 헤이그특사[1907,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해 을사조약(1905)의 부당함을 폭로하고자 한 외교활동]로 파견된 적이 있으며, 연해주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1914)해 정통령(正統領)에 취임하는 등 일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힘썼다.  또한, 그는 한국 근대 수학 교과서(산술신서)를 만든 교육자이기도 하다.

독립운동가 이상설 (사진출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독립운동가 이상설 (사진출처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이 열사는 대한제국이 일제의 불합리한 을사늑약(1905)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조약 파기 상소문을 5차례나 올리는 등 조약 파기 운동을 전개해 조국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심지어 서울 종로에서 을사늑약 반대 연설을 한 뒤 자결까지 시도했으나, 주변인들의 저지로 실패했다.

1907년 이 열사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준(1859~1907, 향년 48세), 이위종(1884~미상)과 함께 고종의 특사(1852~1919, 향년 향년 66세)로 참석했다. 

회의장에서 그는 대한제국이 부당하게 일제로부터 외교권을 박탈당한 사실을 폭로해 이를 바로잡고자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본 회의는 제국주의 열강들의 이권 협상 성격을 띤 회의였고 일제의 방해까지 더해져 이미 외교권이 없는 동아시아 약소국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아울러, 일제는 헤이그특사 파견의 보복으로 이 열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이에 이 열사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해외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친다. 1908년 그는 미국에 머물며 미국 정부 상대로 독립 지원을 호소하는 외교활동을 전개했고 1909년엔 연해주로 넘어갔다.

그는 한민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이바지했으며, 밀산에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 인재를 길렀다. 또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땅을 사들여 가구 100개를 이주시키고 한인마을 ‘한흥동’을 만들었다. 한흥동의 뜻은 ‘한국을 일으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10년 경술년 한일합병으로 국권 피탈 이후 그는 1914년엔 이동휘(1873~1935, 향년 61세), 이동녕(1869~1940, 향년 70세) 등과 만주, 연해주 일대 한인을 규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됐다. 이 열사는 대한광복군정부 설립으로 무장 독립운동 단체를 모아 일제와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주도하고자 했다.

이 열사는 1917년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만을 위해 헌신하다 만리타국 차디찬 연해주 땅에서 46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눈 감고 말았다. 다음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혼인들 조국에 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유고는 모두 불태우고 그 재마저 바다에 날린 후에 제사도 지내지 말라.”

임종을 맞이하기 직전에도 그는 조국 독립 생각뿐이었다. 죽음조차도 그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근대 한국 수학의 아버지

이 열사는 독립운동가이자 한국 근대 수학의 아버지였다. 그의 수학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1886년경에 이 열사가 쓴 책 ‘수리’와 최초의 근대 수학 교과서로 여겨지는 ‘산술신서’ 발간(1900)은 한국 근대수학의 개념을 정립했다.

또한, 그는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1906, 만주에 위치)’을 설립하고 운영함으로써 암울한 일제강점기에 민족을 위한 인재 양성을 위해 힘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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