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벌어진 열강의 대립
용암포 사건, 러일전쟁 원인 중 하나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21년 전인 1903년 4월 21일 러시아가 압록강 하구 용암포를 점령하며 포대를 설치하는 등 압록강 하구 인근 지역을 군사기지화 해 대한제국에 조차(타국에 일시적으로 빌린 영토의 일부)를 요구한 용암포 사건을 일으켰다.

1903년 대한제국은 상황은 일제가 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1895)을 일으키자 고종이 아관파천(1896,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사건)을 하면서 조정 내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진 상황이었다.

러시아와 일제 대립을 풍자화한 그림.
러시아와 일제 대립을 풍자화한 그림.

이로 인해 아관파천 이후 대한제국(1897년 고종이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전환)은 러시아와 두만강 상류, 압록강 유역, 울릉도 등 3곳을 20년 동안 벌채할 수 있게 허락한 삼림 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는 이 조약을 구실로 남하해 압록강 인근을 점령하며 조선을 향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강화하려고 했다.

아울러, 러시아는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운동(1899~1901, 청나라의 반외세 운동)이 한창일 때,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군사 15만명을 만주로 파견해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시작했다. 이 철도가 오늘날 TMR(Trans-Manchurian Railway)로 불리는 만주횡단철도이다.

한반도와 만주, 요동(랴오둥)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었던 일제는 이에 반발했다. 앞서 일제는 청일전쟁(1994) 승리 이후 청나라로부터 요동 반도를 할양받기로 했으나, 러시아가 일제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인 삼국간섭(1895)으로 무산됐다.

이에 더해 일제는 1902년 영국과 제1차 영일동맹을 맺고 영국으로부터 조선에서 특수권익을 인정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이러한 이유로 일제는 러시아의 한반도 남하를 용인할 수 없었다.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에 용암포를 러시아 조차지로 인정할 수 없음을 통보하고 용암포에 개항장을 설치해 모든 국가에도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러시아의 진출이 삼림 벌채 목적이 아니라 한반도 북부 지역에 군사기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러한 일제 반발을 신경쓰지 않고 석탄과 무기들을 실은 군용함까지 정박시키며 노골적인 군사기지화 정책을 펼쳤다. 무능한 임금과 조정, 간신들에 의해 나라가 열강에 잠식되는 것으로 모자라 열강의 두 번째 전쟁터가 되는 길목이었다.  

용암포는 결국 개항지로 변경됐으나 일제와 러시아는 한반도 압록강 하구를 둘러싸고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으며, 이는 1904년에 발생하는 러일전쟁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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