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㉗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현재 거리에서 팔리는 붕어빵, 호떡은 겨울철 인기 식품이며 군밤과 군고구마 역시 겨울 간식으로 친숙하다. 100년 전 거리에선 이보다 훨씬 다양한 품목이 팔렸고 서민 간식으로 인기도 많았을뿐더러 시장규모도 컸다.

품목을 보자면 군밤은 물론이고 현미빵, 러시아빵, 갈돕만두, 갈돕만주, 호떡 등 다양했다. 여기에서 만두, 만주는 알겠는데 갈돕이라는 단어가 매우 낯설다. 1930년 잡지 별건곤에 갈돕만주 장사를 했던 사람의 회고기가 있어 궁금증 해소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갈돕만주란 것을 만들어서 갈돕회 고학생들이 팔고단엿슴니다. 갈돕만주래야 별 것이 안이고 보통 만주에다 손을 서로 잡은 갈돕회 낙인을 찍엇을 뿐이지요. 그리하야 그 만주를 팔어서 엇는 이익으로 고학생들의 생활을 간신히 지탱해 나갓슴니다(팔다가 못팔면 만주를 먹고 지내기도 햇지요).

글에서 보듯이 갈돕만주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 모임인 갈돕회에서 파는 앙금빵임을 알 수 있다. 갈돕회 낙인은 판매 식품에 단체 이름을 새겼다는 뜻이며, 만주에 새긴 글씨나 문양은 불에 달군 인두를 사용했다.

자연스레 갈돕만두는 설명 없이도 이해할 수 있으며 당시 만두는 인기 판매 품목 중 하나였고 지금도 일본에서는 식사 시에 만두를 대단히 즐겨 먹는다.

1920년대 언론을 장식했을 정도로 사회적 관심을 모았던 갈돕회의 활발한 활동이 있었다. 갈돕회는 잡지 ‘갈돕’(1922년) 발간 외에도 연극, 음악회 등 다양한 문화 활동까지 폭을 넓힌 단체였다.(사진 잡지 ‘갈돕’ 국립중앙도서관) 동아일보(1920.09.12.) ‘갈돕’기사는 서로 돕는다는 의미를 갖는 단체라고 설명했다.

갈돕회 발족 시기(1920년)는 1919년 3.1운동 직후이며 전국을 순회하면서 학생연극과 음악회를 열었고 관객 반응 역시 대단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3.1운동 이전 일본 유학생 주도로 2.8독립 선언이 있었고, 일본의 극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던 청년 학생들의 독립 열기와 전국적 호응의 연장선에서 봐야 한다. 1920년대 물산장려운동은 일본 자본에 조선의 상업 기반이 무너지던 안타까움 속에서 출발했다.

갈돕회가 파는 음식에는 물산장려운동과 연계돼 억눌린 조선 민중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현시대 붕어빵이 갖는 서민 간식으로서의 포근한 정감과 갈돕만주가 갖는 시대적 치열함에는 역사적 상황 차이가 있다.

함경남도 중부 홍원지역의 연극 공연에서 입장료 수입(팔십구원구십전) 외에 후원금(백십팔원)과 은비녀도 기부되는 성원이 이를 잘 설명한다. (사진 매일신보 1921.8.25.)

매일신보 1921.8.25.
매일신보 1921.8.25.

1930년 9월 11일 동아일보는 종로서에서 ‘모던빵장사’ 한 명을 포함한 청년동맹원을 검거 조사 중이라는 기사를 냈다.

번외편 카페 이야기에서 말했듯이, 영화 밀정에 등장한 카페 ‘카카듀’는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업종인 덕택에 일경의 눈을 속이는 독립활동 목적이 있던 장소라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는 밀정 활약의 전성기였으며 방방곡곡 시골 장터까지 감시의 눈이 번득였다. 독립군을 밀고하면 포상금이 확실히 지급됐기에 서로를 믿기 어렵던 시절이었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는 장사꾼은 독립군 신분을 감추기에 적합한 직업이었다. 체포된 ‘모던빵장수’는 중요 연락을 수행했던 사람이 분명하다.

한편으로 ‘모던빵장수’라는 명칭이 참 특이한데 개화기 신문물이 쏟아져 오던 과정에서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식문화에 익숙한 사람은 개화된 신식의 사람이자 ‘모뽀모껄’(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줄임말)의 기본소양이었다.

서양 음식인 낯선 빵에는 조선인의 입맛과 농업환경에 상관없이 이러한 시대적 상징성이 부여됐다.

갈돕만주, 현미빵 등은 주로 고학생과 중학생 정도의 어린 청소년이 어깨에 상자를 메고 주택가와 상가 주변을 돌며 팔던 음식이다. 그렇다면 붕어빵과 비슷한 유형인 거리에서 구워 파는 형태의 빵은 언제 처음 나타났을까.(2편에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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