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㉘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솜사탕, 붕어빵, 뻥튀기 등은 21세기 거리에서도 인기 많은 상품이다. 과연 100년 전 거리에서 팔리는 인기 품목은 지금과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까.

100년 전 어린이가 세뱃돈을 받아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던 설날 풍경으로 떠나보자.(사진 매일신보 1920.2.21. ‘음력설 고무풍선 주변 도련님 아기네들’)

매일신보 1920.2.21. ‘음력설 고무풍선 주변 도련님 아기네들’.
매일신보 1920.2.21. ‘음력설 고무풍선 주변 도련님 아기네들’.

기사 사진을 보면 색동옷을 입은 어린이들이 거리의 풍선장수 주변에 모여있다. 1910년대 후반부터 고무풍선은 경성, 부산 등 대도시 거리에서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명절이면 동네에서 어른들이 건네준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넣고 공놀이를 했던 시골 출신 독자는 100년 전 어린이들이 색색의 풍선 앞에서 느꼈을 신기함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과거의 뻥튀기는 지금과 명칭에 차이가 있다.

뻥튀기를 만드는 기계를 ‘곡물팽창기’라 불렀다.(사진 조선신문사 1932.5.13. 곡물팽창기 광고) ‘곡물팽창기’를 사면 작은 자본을 가지고 뻥튀기처럼 돈을 열 배로 불릴 수 있다는 재밌는 광고도 있다.

조선신문사 1932.5.13. 곡물팽창기 광고.
조선신문사 1932.5.13. 곡물팽창기 광고.

솜사탕은 ‘면과자綿菓子’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많이 쓰였다. 솜사탕이라는 정감 넘치는 명칭도 같이 사용됐으나 1945년 해방 이후 솜사탕 용어가 널리 쓰인다.

솜사탕 제조기는 일본인 공장에서 만들었으므로 ‘면과자 제조기’라 불렀고 당시 신문광고를 처음 접한 독자가 외형과 명칭만 보고서 솜사탕 제조기라는 사실을 알기는 어렵다.

면과자 제조기는 1원의 사탕을 가지고 10원~30원의 돈을 만들 수 있다며 솜사탕처럼 돈이 불어나는 달콤한 유혹의 광고를 했다.(경성일보 19319.29 면과자 제조기)

경성일보 19319.29 면과자 제조기.
경성일보 19319.29 면과자 제조기.

지금까지 살펴본 모습을 보면 1980~90년대 모습과 유사해서 붕어빵류의 판매도 활발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당시 상자를 메고 다니면서 빵을 판매하는 방식 외에 현대의 붕어빵처럼 거리에서 바로 구워주는 빵은 자료를 찾지 못했다.

거리에서 바로 구워주는 빵이 아예 없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뻥튀기, 솜사탕과 같이 대중화된 형태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는 현실적으로 넘기 어려운 몇 가지 커다란 제약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이다.

첫째, 1920년대 밀가루 공급 1/3은 자가제분 즉 물레방아나 인력을 활용한 생산이었다. 현재의 밀가루와 비교 입자의 크기도 불규칙한 거친 밀가루로 생각하면 된다.

1800년대 미국 가정에서도 빵을 굽기 전에 밀가루를 채로 걸러내는 과정은 필수적이었다. 즉 양질의 빵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훨씬 많은 시간과 노동력이 필요했다는 뜻이다.

둘째, 1930년대 미국의 제빵사 라이블리 월러비는 미리 만든 비스킷 반죽을 가정에서 구입 냉장 보관했다가 필요할 때 굽는 아이디어로 상품을 개발했다. 이로써 미국 가정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다양한 상품이 보급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미리 만든 반죽을 간편하게 다루려면 적당한 용기와 도구가 필요하고 또한 비싼 가격이면 곤란하니 대량생산 체계가 만들어질 시장형성 시간이 필요했다.

셋째, 일본이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확대되고 40년대에는 진주만 공격으로 미국과의 전쟁으로 밀가루 등 생필품은 총독부의 통제로 시장거래가 아니라 보급체제로 전환됐다.

조선의 거의 모든 제과소는 도시별 지역단위 합동공장 체제로 전환된다. 소규모 점포나 거리에서 빵을 구워 파는 방식이 발달하기에는 열악한 조건이다.

그렇다면 갈돕만주, 현미빵 등을 상자에 메고 다니는 판매형식 말고는 이동식 판매 빵이 전혀 없었을까. 1920년대 러시아빵은 북쪽 지역을 중심으로 유행했고 경성 주변 거리에서도 조선인이 만들어 판매했다.

당시 제과산업은 일본인이 독점하다시피 했고 조선인에게는 잡일을 시키는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러시아가 일본과 적대적이던 상황에서 러시아빵 제조는 인접한 북쪽 조선인의 업종이었다.

당시 잡지를 보면 함경남도 원산元山 거리에서 러시아빵 파는 소리가 들렸고, 함경북도 청진淸津을 다녀오는 어머님은 언제나 러시아빵을 들고 왔다는 회고기가 있다.

오실 때마다 으례히 갖다주시던 흘레발(로시아빵)을 그 때 아래웃집에 살든 申東哲(詩쓰는)군과 나눠 먹으면서 좋다고 뛰어 단이던 일이라던지 모두 그리웁습니다.

위의 글은 1940년 잡지 삼천리에 함경북도 경성鏡城이 고향인 이용악(1914년 출생)이 러시아빵을 먹던 어린 시절을 말했는데 대략 1920년대 초중반 시기로 추정된다.

이 시기가 러시아빵 번성기에 해당하며 자본이 넉넉하지 않은 조선인이 시골 장날에 맞춰 거리 빵 장사판을 벌였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분단으로 인해 북쪽 지방 문화와 자료 접근이 어려운 상태에서 러시아빵 판매가 이동식 제빵체계를 갖췄다고 추정할 뿐이다.

거리에서 직접 빵을 구워 팔아 큰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1950년대 6.25 전쟁기에 나타난다. 전쟁으로 상가나 공장이 파괴되고 전기 등의 동력보다 석탄이나 숯을 이용한 에너지가 훨씬 구하기 쉬웠고 고급보다는 배고픔을 해결할 양이 중요했던 시절이다.

1952년 4월 평화신문 기사에 소자본으로 성공 상점을 얻어 사장님이 됐다는 ‘행길 빵장수’ 이야기는 거리의 빵장수 성공 신화이다.

마산일보 1961.5.20. 빵장수 손바쁜 아줌마.
마산일보 1961.5.20. 빵장수 손바쁜 아줌마.
마산일보 1964.7.8.
마산일보 1964.7.8.

거리의 빵장수 판매 형태 사진을 찍어 보도한 1961년 마산일보 기사를 보면 커다란 빵틀에 동그란 호빵 형태의 빵 9개가 놓였고 판매를 위한 상자에 놓인 빵들이 보인다. 반죽 덩어리를 성형해 굽고 옮기면서 불을 조절하는 등 분주했을 아주머니의 모습이 잘 그려진 기사이다.(사진 마산일보 1961.5.20. 빵장수 손바쁜 아줌마)

1964년 마산일보는 영세민에게 빵틀과 리어카를 임대 지원한다는 기사를 냈다. 빵틀과 각종 도구를 나르기 위해서 리어카를 함께 빌려주는 지원 프로그램으로 현재의 붕어빵 시스템과 같은 일체형 리어카는 아니다.(사진 마산일보 1964.7.8.)

반죽과 빵틀, 불과 조절장비 등을 일체형으로 만들어 수레나 트럭에 하나의 작은 빵집이 완성된 시기는 한참 뒤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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