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언의 100년 전 빵 이야기 ㉙

인천투데이=김다언 작가|해주시는 황해도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일본, 인천, 진남포 등의 교역이 많았으며 도청소재지이다. 해주는 예로부터 좋은 돌이 많아 문방사우 중 벼루에 먹을 가는 묵墨이 유명해서 해주묵海州墨은 조선의 으뜸이었다.

제주가 삼다도라는 별칭이 있듯이 해주를 일컬어 좋은 암석이 많고 미인 등이 많아 해주삼다海州三多로 통했다.

1925년 잡지 개벽의 황해도답사기黃海道踏査記에 “‘장개는 海州로 가고 시집은 연백延白으로 가라’는 것은 역시 海州에 미인이 만코 延白에 백미白米가 만흠을 의미한 것이다”라는 글이 실릴 정도로 해주미인은 유명했다. ‘남남북녀南男北女’라는 속언은 이러한 오랜 전통에 기인한다.

조선신문사 1924.01.1. 국지탁일 제과소.
조선신문사 1924.01.1. 국지탁일 제과소.

인천항은 해상로를 통한 충청권과의 활발한 교역으로 인적 교류 또한 많았는데, 남북 단절 이전에는 해주항을 중심으로 황해도가 충청권처럼 활발했다. 해주항은 북선(북한지역)의 광물자원 일본 반출이 가장 큰 교역이고 다음으로는 인천과의 무역이었다.

연산군 시절 만들어진 해주 부용당芙蓉堂은 명승고적으로 수도권과 가까워 많은 문인과 역사학자가 찾던 명소였고 해주는 관광지로도 유명했다. 1935년 통계로 마산 인구(2만7000명), 군산(2만6000명), 해주(2만3000명) 정도 규모로 항구도시 중 해주는 서해안의 비교적 큰 도시였다.

이런 배경으로 해주의 빵집은 일찍부터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신문에 광고했다. 국지탁일, 상미당 제과소는 매우 이른 시기인 1924년부터 꾸준한 광고를 한다.(사진 조선신문사 1924.01.1. 국지탁일 제과소)

해주의 제과소 중 상미당은 특히 눈에 띄는 상호이다. 현재 전국적인 프랜차이즈 제과점 파리바게뜨로 익숙한 SPC삼립의 모태가 상미당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사진 상미당 출처 SPC삼립 홈페이지)

상미당 출처 SPC삼립 홈페이지.
상미당 출처 SPC삼립 홈페이지.

창업주 허창성(1914년생)은 해주가 고향으로 해주의 일본인 제과소에 근무하며 기술을 배웠고 해방 후 고향을 떠나 월남 서울에서 상미당을 개업했다.

일본인이 경영하던 해주의 상미당은 1928년 광고에서 이전과 달리 제과소와 양식료품부를 겸한 규모가 커진 광고를 냈다.

조선신문사 1928.01.1. 상미당제과소.
조선신문사 1928.01.1. 상미당제과소.

아마 장사가 잘돼 사업 규모가 점차 확대됐던 것으로 보이며 허창성은 해주 상미당에서 근무하며 기술을 배웠을 가능성이 크다.(사진 조선신문사 1928.01.1. 상미당제과소)

해방 후 상미당이라는 제과소 상호는 SPC삼립 모태인 서울만이 아니라 제주도, 경상도 등 전국에 걸쳐 존재했다. 일제강점기 일본과 만주, 조선 전역에서 팔리던 화장품회사 ‘상미당’이 유명해 나타난 현상이다.

화장품회사 상미당이 갖는 전국적 인지도에 깨끗하고 심미美적인 느낌 외에도 미味각을 사로잡는 달콤한 빵을 만든다는 일석이조 효과의 이미지가 ‘상미당’이었다.(사진 조선신문사 1928.5.25. 동경 상미당 향장품 광고)

조선신문사 1928.5.25. 동경 상미당 향장품 광고.
조선신문사 1928.5.25. 동경 상미당 향장품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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