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대군,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다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518년 전인 1506년 9월 28일 중종반정이 발발했다.

중종반정은 성희안, 박원종, 유순정 등이 중심이 돼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옹립한 사건이다.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중종 정릉 (사진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중종 정릉 (사진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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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자신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를 둘러싼 죽음을 알게되자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과 폐비 윤씨 죽음에 관련한 자들을 숙청했다. 이때부터 연산군의 폭정은 가속화됐고 조정에서는 반정의 움직임을 취했다.

유교 사상에는 “국왕이 잘못하여 천명을 잃을 경우, 왕위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이는 반정 명분에 힘을 실어줬고 아울러 반정으로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은 성종의 적자이기에 정당성 역시 충분했다.

이에 연산군에게 직언하다 이조참판에서 파직당한 성희안이 무관인 박원종과 이조판서 유순정 등 세력을 모아 반정을 기획했다.

마침내 9월 28일 새벽 거사가 발생했다. 이미 민심이 떠난 연산군을 위해 반정세력을 막아서는 자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들은 새벽에 창덕궁 앞에까지 도달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 조정 중신들까지 합류했다.

반정 세력은 연산군 최측근인 임사홍과 신수근을 참살하고 연산군 신병을 확보했다. 이에 연산군은 폐위돼 강화도로 유배를 떠났고 진성대군이 왕으로 추대받아 중종이 됐다. 연산군은 폐위된 지 두 달여만에 세상을 떠났다. 

중종반정은 폭정에 대항한 신하들의 저항이 성공한 사례였다. 이는 왕이 왕 답지 못하게 폭정을 일삼고 민심을 잃을 경우, 유교 사상에 근거해 폐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자 역사적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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