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대항한 평민출신 의병장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18년 전인 1906년 4월 6일 평민 출신 의병장이자 ‘태백산 호랑이’로 불린 신돌석(1878~1908, 향년 30세)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거병했다.

신돌석은 경북 영덕군 출신으로 강원도와 경북일대 태백산맥에서 의병 활동을 해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신돌석 장군 기념관 내부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사진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신돌석 장군 기념관 내부 충의사에 있는 초상화 (사진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 

신돌석은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9세 나이에 의병활동에 가담했다. 이후 1905년엔 을사조약을 계기로 국내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자신이 살던 마을(경북 영덕군)에서 의병단체인 ‘영릉의진’을 조직하고 의병 100명 이상(약 300명)을 이끌며 항일의병 활동을 했다.

그의 공격 대상은 강원 양양, 삼척, 경북 울덕, 울진 등 지역 중심지에 위치한 일제의 전초기지였다. 신돌석은 의병을 이끌어 공격해 탄약과 무기를 보충하며 일제에 대항했고 일본인들이 살던 가옥도 부수고 일본인들의 돈을 빼앗기도 했다.

이에 더해 일제가 장악했거나 일제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지역 기관(경찰서, 우편소) 등을 습격했고 어업 침략을 일삼은 일본 어부나 수산업자들도 공격 대상 중 하나였다.

일본인을 대상으로 한 반외세적 활동은 일반 민중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신돌석이 평민 출신 의병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양반들이 그의 의병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1908년 9월부터 신돌석의 의병활동은 크게 위축됐다. 일본군의 수가 그 전보다 크게 증가했고 일제의 대규모 의병 토벌작전으로 의병 수가 줄며 보급도 힘들어졌다.

이에 신돌석은 의병들에게 후일을 도모하자고 하며 일단 제 살길을 찾아 떠날 것을 명령했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옛 부하인 김상열(金相烈, 생물연도 미상), 김도룡(金道龍, 생물연도 미상) 형제 집에 찾아가 잠시 일제의 눈을 피하려 했지만, 이들이 신돌석에 걸린 현상금을 노리고 신돌석을 살해하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인도돼 마을근처에 묻혔으나 1971년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1962년엔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를 받았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