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조선과 백성 안위를 생각해 제 몸을 돌보지 못한 명군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574년 전인 1450년 4월 8일, 백성을 사랑했던 조선 최고의 임금이자 한국 역사 최고의 지도자이며 세계사에도 길이 남을 세종대왕(휘 이도, 1397~1450, 향년 52세)가 승하했다.

세종대왕은 충녕대군 시절부터 학문에만 집중했다. 역대 조선 왕 중에서도 그는 ‘독서광’의 면모를 보여줬다. 오죽하면 선왕인 태종 이방원(1367~1422, 향년 54세)이 아들 세종대왕의 건강을 염려해 서책을 모조리 치우게 했다.

아무리 태종이 서책을 모조리 치워 못 보게 했어도 세종대왕의 글 읽기를 굽힐순 없었다. 이 때 세종이 굴하지 않고 ‘구소수간(중국 송나라 대문호 구양수와 소동파의 편지글을 엮은 책)’ 단 한 권을 몰래 챙겨 읽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세종대왕 표준영정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대왕 표준영정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방과 과학, 문화, 예술 발전시키고 언문까지 창제한 세종대왕

그는 1418년 21세 약관(20세)을 갓 넘는 나이부터 왕위에 올라 애민정신으로 국정을 돌봤다. 그 결과 조선은 국방·과학·문화 예술 등 전방위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국방 부분에선 신기전을 비롯한 화약무기 개발에 힘썼고 4군 6진(평안북도와 함경북도 부근 여진족을 몰아내고 만든 군사기지)을 설치했다. 이로써 두만강과 압록강이남 부분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해 실효지배했다. 이와 함께 이종무(1360~1425, 65세)에게는 대마도를 정벌하게 해 왜구의 창궐을 저지하고 백성들 보호했다.  

세종대왕은 천문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서운관을 설치했다. 아울러, 장영실(생물년도 미상) 등을 등용해 혼천의(천체관측기구), 앙부일구(해시계), 자격루(물시계), 측우기(강우량 측정 도구)를 만들었다. 이러한 과학 기술·도구의 발전은 농업에 종사하는 백성의 생활에 큰 도움을 줬다. 

그는 1420년엔 학문 연구기관인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 양성에 힘썼고 유교정치의 기반이 되는 의례·제도 정비를 도모했다. 그가 제정한 공법(세금제도, 농사의 풍흉을 반영해 세금을 차등적으로 거둠) 역시 백성의 사정을 생각해 만든 전세제도 였다.

세종대왕은 예술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궁중음악 등을 정비해 한국 국악의 기초 확립에도 기여했다. 그가 직접 작곡한 '여민락'은 '백성과 함께 즐긴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또 농민을 위해 조선 풍토에 알맞은 농법을 모아 편찬한 책인 ‘농사직설’을 반포했다.
농사직설은 조선 풍토에 알맞은 농법을 조사해 책으로 정리한 농업서이다. 세종이 주도해 1429년 편찬하고 1430년 반포했다.

이외에도 유교가 정치와 학문, 철학 등의 이념을 넘어 종교적 측면까지 역할을 맡을 수 없다는 점을 파악해 숭유억불 정책을 완화하며 조선시대에도 불교 서적이 간행될 수 있게 했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한글을 창제하다

세종 임금의 애민정신이 가장 빛나는 업적은 역사에 길이 남아 오늘날 국경일까지 제정된 한글창제이다. 한글창제는 인류사에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 받는다.

그는 일반 백성이 글자 없이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음을 마음 아프게 여겼다. 

그들 민중은 관청에 호소하려 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고, 억울한 재판을 받아도 바로잡아 주기를 요구할 도리가 없었으며, 편지를 쓰려고 해도 그 어려운 한문을 배울 수가 없었다. 또한, 농사일에 관한 간단한 기록도 할 방법이 없었다.

이러한 백성의 노고를 파악한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담은 훈민정음을 창제한다. 훈민정음 언해본을 보면 세종대왕이 얼마나 백성을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훈민정음 언해(訓民正音諺解, 중세 한국어: 훈〮민져ᇰᅙᅳᆷᅌᅥᆫ〮ᅘᅢᆼ〯) 본은 한문으로 쓰여진 <훈민정음 해례본>중에서 어제(御題) 서문과 예의(例義) 부분만을 따로 한글로 풀이해 간행한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완전한 책의 형태를 갖춘 단행본이지만 '언해본'이라고 통칭되는 '훈민정음 언해'는 <월인석보> 1권 책머리에 실려있다. 다음은 훈민정음 언해본이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기에,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백성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위하여 가엾이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쓰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그렇게 세종대왕은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로 평가받는 ‘훈민정음(1443)’을 창제했다. 훈민정음은 500여년 전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은 현대까지 공식 언어로 사용되며 민족의 역사와 문화와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훈민정음은 대한민국의 유산이자 세계기록유산이다.

평생을 백성을 생각하다 자신을 돌보지 못한 세종대왕

이렇게 세종대왕은 즉위 내내 다양한 분야에서 조선 발전과 백성의 안위를 위해 힘썼다. 그러한 여파 탓 인지, 세종대왕은 말년에 각종 질병을 얻고 말았다.

그는 육식을 즐기고 선왕인 태종과 달리 사냥 등을 멀리해 말년에 비만과 성인병으로 고생했다. 

이로 인해 정상적으로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된 세종은 1443년경부터 훗날 문종(1414~1452, 향년 37세)이 되는 세자 이향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이후 병세가 악화된 세종대왕은 1450년 4월 8일 52세 나이로 승하했다. 

이향은 아버지 세종을 보필해 한글창제 등 각종 국책 사업에 참여하며 명군을 계승할 세자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위 3년차인 1452년 6월 10일 승하하고 만다.

문종 승하 후 세자 단종(1441~1457, 향년 16세)이 즉위 했지만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1417~1468, 향년 50세)이 계유정난 반란를 일으켜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그가 왕위에 오르니 세조 임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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