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필, 독립신문으로 국권 수호와 국민 계몽 꿈 꿔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28년 전인 1896년 4월 7일 최초의 한글·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창간됐다.

독립신문은 독립운동가 서재필(1864~1951, 향년 86세) 박사가 유길준(1856~1914, 향년 57세) 등 정부 개화파 인사와 합작해 창간한 신문으로 창간 당시에는 한글판(독닙신문) 3면과 영문판(The Independent) 1면으로 주3회 발행했다. 1897년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분리되고, 1898년 7월 1일부터는 일간으로 발행됐다.

독립신문의 모습 (사진출처 우리역사넷)
독립신문의 모습 (사진출처 우리역사넷)

독립신문은 가로제호, 한글전용, 띄어쓰기 등을 도입했고, 1면 머리에 논설을 실어 정부와 집권 위정자들을 비판하고 탐관오리의 부정부패를 폭로했다. 또한, 독립신문 영문판은 당시 외국인에게 조선의 사정을 알리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일제가 을미사변(1895) 등을 일으켜 조선 국권 피탈에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또한, 언론마저도 일제가 장악했다.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민간신문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재필 박사는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독립신문은 서 박사가 정부 개화파와 손잡고 창간한 신문인 만큼, 창간 초기엔 정부에 협조적인 논조를 펼쳤다.

그러나 정부는 을미사변의 여파로 고종(1852~1919, 향년 66세)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며, 외세와 관련해서는 친러반일적인 색채를 보였다.

이에 서 박사는 친러 성향의 정권을 비난하고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했다. 아울러, 러시아를 포함한 열강의 침략정책을 비난하는 논설을 게재하고 열강에게 이권을 양도하던 정부를 반대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활동을 벌인 서 박사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서구 열강들의 눈엣가시가 됐다. 러시아와 일본의 공사관, 정부 관료들은 그를 추방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고 결국 1897년 12월 서 박사는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다.

독립신문도 서서히 힘을 잃었다. 1899년 7월 정부는 독립신문에 임대 제공한 사옥의 반납을 요구했다. 1899년 12월 정부는 서 박사에게 4000원을 지급하며 독립신문의 판권과 인쇄시설을 인수했고 아일랜드 사람을 주필로 고용해 국문판과 영문판을 일간으로 속간한다 약속했지만, 신문 매수 후 폐간해 버리며 독립신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독립신문은 짧은 기간 동안 발행됐으나, 일제와 서구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혼란의 시기 속, 국권을 수호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위해 힘썼다. 구한말 조선과 대한제국이 근대 사회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국민에게 전달함으로써 국민 의식의 전환에 큰 영향을 줬다.

특회, 당시 대중이 접하기 어려웠던 민주주의 개념을 전파했다. 이는 대중에게 새로운 정치사상을 보급하고 민권에 대한 인식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아울러, 독립신문은 한글 신문으로서 띄어쓰기, 쉬운 국어 쓰기 등을 실행해 한글의 보급과 발전에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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