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과 전쟁이 낳은 이별의 아픔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39년 전인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처음으로 이뤄졌다.

남북 이산가족은 한반도 분단과 한국전쟁의 역사적 산물로 분단이 공고화되자 발생했다. 이로 인해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특별성명으로 이산가족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했다.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모습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 당시 모습 (사진출처 국가기록원)

이에 손성필 북한 적십자중앙위원회 위원장이 답신으로 호응했고 같은 해 8월 20일 남북적십자 간 판문점 중립국감독위 회의실에서 사상 첫 회담을 개최해 예비회담을 20여차례 진행했으나 실질적 진전과 상봉은 없었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남북 대화는 재개하지 못하다가 1984년 남한의 홍수 피해에 북한이 수해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서면서 대화가 시작됐다.

이후 1985년 5월부터 12월까지 8~10차 남북적십자 본회담을 진행했고 이때 남북 이산가족 첫 번째 만남이 이뤄졌다.

남북은 1985년 8월 15일을 기념해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을 교환할 것을 제8차 회담에서 합의했고 같은 해 9월 20일 고향방문단 교환을 진행했다. 이로 인해 남북 이산가족 방문단 100명 가운데 65명이 가족·친척 92명과 상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6년 남북관계가 다시 경색 돼 남북적십자회담 제11차 본회담 개최 논의, 제2차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논의가 무산됐다.

이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산가족 상봉 합의)이 치러진 그해 8월 15일이 돼서야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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