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군 팽목항에서 목포신항까지, 걸어서 68km
인천지역 노동자 10여명 참가··· ‘다시, 동행’ 5일

인천투데이=송승원 기자|오늘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4월 15일 저녁 인천항에서 제주를 향해 출발한 청해진해운 소속 카페리(car-ferry) 여객선 세월호가 16일 아침 진도군 병풍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했다. 방송은 '전원구조'라고 보도했고 출근 길 시민들은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얼마지 않아 방송 보도는 최악의 오보 였고 세월호 침몰은 대형 참사로 이어졌다. 온 국민은 배가 침몰하는 영상을 그대로 지켜 봐야 했다. 병풍도 인근 해역을 지나던 상선과 어선은 여객을 구하기 위해 침몰 사고 인근에 대기 하고 있었으나 선사는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사이 선장을 비롯한 몇명을 속옷차림으로 배를 빠져나와 해경 선박에 옮겨탔다. 

세월호 침몰 사고 원인을 보면 우선 세월호는 선박이 싣을 수 있는 화물 보다 많은 과적 화물을 싣고 있었다. 그런 화물은 또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선박의 안정성이 크게 저하됐다.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화물이 선박이 방향을 틀 때 튕겨나가며 선체 측면을 부쉈고, 물이 차기 시작했다.

둘째, 세월호는 실제 흘수와 다르게 불법 선박 개조가 이뤄졌다. 이 불법 개조로 인해 선박의 균형과 안전성이 더욱 악화됐다.

셋째, 세월호의 승무원들이 위급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안았다. 특히, 선장과 일부 승무원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승객들에게 충분한 대피 지시를 제공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초기에 자신들만 먼저 탈출을 시도했다. 이러한 부적절한 대응은 참사의 피해를 더욱 확대시켰다.

온 국민이 제일 분노하고 안타까워 한 건 부실한 구조작업이었다. 해수부와 해경 등 정부의 구조 작업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구조 작업은 지연됐고, 초기 대응이 미흡했던 점도 희생자 수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발생한 큰 사고로 제주로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등학교 학생 250명을 포함해 승객 304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10년 주기를 맞이했지만 아직도 ‘그날’의 상흔은 여전하다. 〈노동자교육기관〉은 10주기를 맞아 추모 도보순례 ‘다시, 동행’을 기획했다. 인천지역 노동자 10여명이 그날의 현장으로 찾아갔다. 이 글은 도보순례 '다시 동행' 5일의 기록을 정리한 마지막 글이다.<기자말>

3월 12일, 날씨가 굉장히 흐린 날에 전라남도 진도군 팽목항을 찾았다. 인천 백운역에서 차를 타고 달린 지 약 6시간 만이었다.

인천지역 노동자 단체인 〈노동자교육기관〉 회원 10여명은 세월호 참사 10주기를 맞아 이곳 팽목항을 찾았다. 인천 백운역 인근에서 전라남도 진도군까지 430km, 차로 약 6시간이 걸렸다.

전라남도 진도군 팽목항 인근에 노란 리본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차에서 내렸을 때 가장 먼저 반긴 것은 세차게 불어오는 바닷바람이었다. 하늘은 온 데 구름이 껴 푸른빛은 찾을 새도 없이 온통 창백한 표정이었다.

팽목항은 인적이 드물었다. 어선 몇 척만 황량한 바다에 둥둥 떠다녔다. 도로에선 아주 가끔 차가 지나갈 뿐이었다. 철망에는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거나 추모 공간 건립을 요구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오래전부터 내걸린 듯 여기저기 헤져 있었다.

서해만 따로 놓고 본다면 남북 분단 체제에서 인천은 거의 최북단이고 전남 진도는 최남단이다. ‘노동자’와 ‘세월호’, 얼핏 보기에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조합인데, 그들은 왜 10년이 지난 올해 ‘다시’ 걷자고 모인 것일까.

10년이 흘러도 여전한

도보 순례 첫날, 참가자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회를 성토하는 얘기가 줄을 이었다.

한 참가자는 1999년 인천 중구에서 발생한 ‘인현동 화재 참사’를 꺼냈다. 그는 자신이 참사가 있기 얼마 전 바로 그 호프집을 찾았었다고 하며 “운이 좋아 살아남은 것 아니냐”고 당시 기억을 소환했다.

이어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서 2022년 10월 이태원 참사까지, 결국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게 아니냐”며 “운이 좋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게 정상적인 국가가 과연 맞는가”라고 질타했다.

참가자 중에는 인현동 화재 일주일 전 같은 점포에 방문한 이도 있었다. 현재 녹색정의당에서 인천 서구지역위원장을 맡고 있는 고아라씨였다.

고씨는 “당시 피해자인 학생들을 ‘불량 학생’으로 매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결국 사회 구조 문제에서 (사고가) 비롯하지 않았나”라며,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태도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다시, 동행’ 참가자 강승연씨는 이번 세월호 참사 10주기 도보순례에 참가하며 영상 기록을 맡았다. 그는 2022년 이태원 참사 당시를 또렷이 기억했다.

강씨는 “이태원으로 자주 놀러 가는 친구가 있었다. 그런데 (2022년 이태원) 참사 당시 하필 그 친구와 연락이 안 닿았다”며 “너무 걱정돼 그 친구 어머님부터 남자친구까지 주변에 연락되느냐고 물었다. 연락이 하도 안 돼 울면서 걱정하고 그랬다”고 떠올렸다.

이어 “그 이후 주말이 지나 회사에 출근했는데, 한 동료가 ‘우리 뭣 하러 일하고 있지’하고 한탄했다”며 “그런 참사가 우리 사회에 ‘언제든 죽을 수 있다’는 집단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다”고 전했다.

'다시, 동행' 이튿날, 참가자들이 진도군 상점가를 지나고 있다.
'다시, 동행' 이튿날, 참가자들이 진도군 상점가를 지나고 있다.

그래도 달라진 건 있다

5일간 도보 순례를 하며 주민들과 마주치는 일도 더러 있었다. 대부분은 저 멀리서 밭을 매는 주민을 바라만 보거나, 맞은편에서 지나가는 정도였지만 가끔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인사를 해오는 일도 있었다.

첫날, 일정을 마치고 식당에 도착했을 때였다.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노란 조끼를 입은 채 그대로 식당에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식당 사장은 “벌써 10년이나 됐냐”고 하시며 놀라는 한편, “좋은 일 한다. 조심히 지내다 가라”며 당부하기도 했다.

사흘째 되던 날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점심 식사를 위해 찾은 식당이었다. 자매가 운영하는 듯했는데, 그중 한 분이 “우리 아들도 (희생된 단원고 학생과) 같은 나이”라며 “참 안타까운 사고”라고 말했다.

모두 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서는데 “몸에 좋은 것”이라며 페트병에 담긴 고로쇠물을 건네주기도 했다.

도보순례를 주최한 〈노동자교육기관〉 박지영 대표는 “10년 전에도 이곳 진도를 찾았다”며 “당시엔 외지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추모하고 기리는 것을 주민들이 달가워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박 대표는 이어 “올해 10주기를 맞아 다시 걷는 동안 10년 전과는 다른 모습을 체감했다. 주민들이 반겨주시는 것을 넘어 우리와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듯하다”고 밝혔다.

참사의 ‘진짜 원인’은

2014년 세월호 참사가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하였음은 자명하다. 사고 자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과적이나 평형수 등 선박 관리 차원의 문제도 문제거니와, 사고 수습 과정에서 대처가 미흡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타워크레인 노동자 안순일씨는 자신이 해군을 나왔음을 전하며 “배가 침몰하기 전에 탑승객에게 구명조끼를 입히고 갑판으로 내보냈으면 모두 살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안씨는 이어 “왜 승객에게 나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안내방송만 되풀이 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며 “10주기가 되니 우리 아들이 딱 고등학교 2학년이다. 유가족의 심정이 어땠을지 느껴진다”고 안타까워했다.

목포신항 앞에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팻말이 놓여 있다.
목포신항 앞에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팻말이 놓여 있다.

2014년 4월 16일 오전 10시 15분, 이미 배가 상당히 기울었을 때 단원고등학교 모 학생은 부모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 다른 안내방송은 안 나와요” 17분이 지나 배는 뱃머리만 남긴 채 완전히 가라앉았다. 참사는 304명이 목숨을 잃게 했다.

안전과 재난 문제에 관한 ‘관리 공백’은 아직까지 유효하다.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예년보다 관리 인력을 적게 편성한 것, 사고 발생 이후에도 이를 긴밀히 수습하지 못한 것은 책임자 문책 요구로 이어졌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고부터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그리고 2011년 첫 사망자를 발생시킨 가습기 살균제 사건, 2014년 세월호 참사, 2022년 이태원 참사까지 ‘안전한 사회’는 아직 요원하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참가자들은 10주기 추모 도보순례에 참여하게 된 이유로 ‘기억’과 ‘더 나은 사회’를 꼽았다. 참사가 있었음을 잊지 않고, 같은 참사와 그 아픔이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부평구의원을 지냈던 이소헌씨는 1주기를 즈음한 9년 전에도 팽목항을 걸었다. 이씨는 “당시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약속을 다시 확인하고, 추모하는 마음을 보태고 싶어서 10주기를 맞아 다시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미 일어난 사고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선 사고 이후 대처가 중요한 것 같다”며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선 잊지 않고 기억으로 뭉쳐야 한다”고 말했다.

고아라씨는 “10주기에 걸으며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며 “개인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노력해야 할 문제”라고 밝혔다.

안순일씨 또한 “계속 반복하고 있는 사회 참사를 막기 위해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구축되길 바란다”며 “중대재해처벌법을 비롯한 안전 관련 법안을 더 촘촘하고 세밀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동행’을 기획한 박지영 〈노동자교육기관〉 대표는 “10주기를 맞아 노동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했다”며 “‘안전한 사회’를 논의하기 위해 도보순례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이어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했음에도 너무 많은 노동자가 현장에서 사망하고 있다”며 “인천에서 ‘작은 공장 안전 실태조사’를 진행하려 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또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간담회를 열어 공론화하려 한다”며 “가능하면 시나 구 등 관과 협력해 노동안전정책을 제안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인양된 세월호 선체가 목포신항만에 거치돼 있다.
인양된 세월호 선체가 목포신항만에 거치돼 있다.

목포신항 ‘세월호’는 지금

5일간 도보 일정을 거쳐 16일 목포신항에 도착했다. 발이 푹푹 빠지는 진흙밭이나 끝이 없는 해안도로를 지나오는 동안 대부분 참가자들이 무릎이나 발목에 통증을 호소했다.

목포신항 주변 철망에는 수많은 노란 추모 리본이 매여 있었다. 그동안 비바람에 햇볕에 싸리눈에 그대로 놓여 있었을 리본은 이미 빛이 바래고 헤져 있었다. 그간 세월을 짐작케 했다.

그 사이로 매여진 지 얼마 안 된 듯 노란빛이 선명한 리본들도 눈에 보였다. 아마 멀지 않은 과거에 방문한 누군가가 맸을 것이다. 아직 ‘그날’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았음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목포신항 철망을 따라, 줄줄이 주차된 차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세월호가 보인다. 세월호는 2017년 인양 이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녹슬어 드러난 붉은 속살이 앙상해 보였다.

그 앞 철망에 매인 리본에 써진 ‘오래 오래 기억하겠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어떻게 기억을 간직하고, 이젠 정말 달라졌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어른들이 미안하다’는 문구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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