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발생 세월호 참사 10주기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10년 전인 2014년 4월 16일 오전 전날 저녁 인천항에서 출항한 청해진해운 카페리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병풍도 인근 해역에서 침몰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당시 세월호는 수학여행을 가던 단원고 학생들을 비롯해 탑승객 476명을 태우고 인천항연안여객터미널에서 15일 저녁 출발해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과적과 고박 불량, 불법 선박개조, 부실한 초기 구조대응으로 탑승객 476명 중 172명만 구조되고 나머지 304명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 당시 모습 (사진출처 해양경찰청)
세월호 침몰 당시 모습 (사진출처 해양경찰청)

10년 전 그날의 참상을 되돌아보다 

사망자와 실종자 304명 가장 많은 희생자는 수학여행길에 올랐던 경기 안산시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단원고 학생 사망자는 248명이며, 교사 10명이 학생 곁을 지키다 사망했다. 가족 또는 친구들끼리 여행을 떠난 일반인 희생자도 무려 46명에 달했다. 

침몰 전 세월호는 참사 발생 전날인 4월 15일 오후 9시에 인천항에서 제주항을 향해 출발했다. 원래 출발 시간은 오후 6시 30분이었으나 악천후로 출발이 지연됐다.

세월호는 4월 16일 오전 8시 49분경 전남 진도군 맹골수도에서 급격하게 변침했다. 이로 인해 배는 곧 중심을 잃었고, 이때 기울어진 쪽으로 제대로 고박되지 않은 과적 화물이 선체 외벽에 부딪혀 선체가 파손됐다. 파손된 곳으로 물이 점점 차기 시작했고 기울던 배는 침몰하기 시작했다.

오전 8시 52분경 단원고 학생이 119에 구조요청 신고를 해 오전 9시 30분 목포해경 경비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으나 자력으로 빠져나온 승객과 승무원들만 구조했고 대부분 인원들은 배에 갇힌 상황이었다.

과적에 불법 구조개선에 선체 파손까지 겹쳐 복원력을 상실한 배는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다, 하지만 선내에선 “위험하니 이동하지 말라”는 방송만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배와 승객을 지킬 의무가 있는 세월호 선장 이준석은 학생들과 승객을 버리고 속옷 바람으로 배에서 나와 구조됐다.

오전 11시경 단원고는 해경으로부터 “단원고 학생 423명 전원 무사 구조 완료”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리고 일부 언론들은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뉴스를 전했다.

안일한 안전의식, 어른들의 무책임한 태도가 만든 참사 

세월호 침몰 사고 원인을 보면 우선 세월호는 선박이 싣을 수 있는 화물 보다 많은 과적 화물을 싣고 있었다. 그런 화물은 또 제대로 고정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선박의 안정성이 크게 저하됐다. 제대로 고정되지 않은 화물이 선박이 방향을 틀 때 튕겨나가며 선체 측면을 부쉈고, 물이 차기 시작했다.

둘째, 세월호는 실제 흘수와 다르게 불법 선박 개조가 이뤄졌다. 이 불법 개조로 인해 선박의 균형과 안전성이 더욱 악화됐다.

셋째, 세월호의 승무원들이 위급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안았다. 특히, 선장과 일부 승무원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승객들에게 충분한 대피 지시를 제공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초기에 자신들만 먼저 탈출을 시도했다. 이러한 부적절한 대응은 참사의 피해를 더욱 확대시켰다.

온 국민이 제일 분노하고 안타까워 한 건 부실한 구조작업이었다. 해수부와 해경 등 정부의 구조 작업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구조 작업은 지연됐고, 초기 대응이 미흡했던 점도 희생자 수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참사 초기 놓쳐버린 골든타임

일부 언론이 전원구조라는 오보를 보도할 때 실제 사고 현장에선 가라앉는 배 내부 승객들을 구조하기 위해 목포 해경구조대가 선내 진입 시도 중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강한 조류로 실패해 오전 11시 30분 세월호는 배 앞부분 일부만 남긴 채 침몰했다.

그렇게 해경 등 구조 당국은 무능한 대응능력으로 골든타임을 놓쳤다. 여기다 일부 언론들은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내며 단원고 학생 학부모와 일반 탑승객 가족들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해경 당국은 세월호 침몰 당시 선체가 108도 가량 기울어 전복 침몰하기 직전의 긴박한 상황이었으나 “여객선 자체 부력이 있으니 차분하게 구조할 것”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아울러 당시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은 오전 10시 30분경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사실을 듣고도 경찰대학교 경찰 간부후보 졸업식에 참석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건 발생 2일 후 4월 18일 오후 1시 30분, 세월호는 완전히 바다속으로 가라앉았다. 구조되지 못한 인원 304명은 여전히 배 안에 있었다.

4월 18일 해경은 첫 선내 진입에 성공했으나, 생존자 없이 시신만 수습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당시 정부를 비롯한 구조 당국의 부실하고 안일한 대응으로 추가 생존자 확보는 없었다. 

세월호 참사 추모 리본.
세월호 참사 추모 리본.

세월호 참사 이후

참사 후 2015년 5월, ‘4.16 세월호 희생자·실종자·생존자 가족대책위원회’가 발족해 진상규명 활동을 전개했다.

같은 해 10월 검찰은 세월호 참사 수사 결과를 발표했으나, 근본적인 의혹은 해결하지 못한 채 참사의 원인을 선원과 선사, 해경으로 돌렸다.

검찰이 발표한 내용은 “조타수의 조타미숙으로 인한 대각도 변침으로 배가 좌현으로 기울며 제대로 고박되지 않은 화물이 좌측으로 쏠려 복원성을 잃고 침몰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11월에는 세월호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1기가 출범했으나 당시 여당인 새누리당(현재 국민의힘)의 반대로 조사를 하지 못한 채 2016년 9월에 강제 종료됐다.

2016년 6월, 참사 788일만에 인양 작업이 시작됐고 2017년 3월에 약 3년 만에 침몰했던 세월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양된 세월호 선체가 목포신항만에 거치돼 있다.
인양된 세월호 선체가 목포신항만에 거치돼 있다.

바뀌지 않은 한국 사회

세월호 참사는 배가 침몰하는 순간 모든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탑승객들을 구해내지 못해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이에 더해 사망자 304명 중 248명이 수학여행을 가던 중 참변을 당한 학생들이었기에 슬픔은 증폭됐다.

또한, 학생들에게 “위험하니 가만히 있어라”는 지시를 하고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한 사실은 어른들에게 반성과 책임을 요구했다. 그리고 안전 사회 구축 필요성에 사회적 공감대를 불러일으켰다.

세월호가 침몰해 한국 사회에 큰 아픔을 줬지만, 아직 사회는 변하지 않았고 재난과 사고에 무감각하다. 그 결과 이태원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 등 과거 아픔을 반복했다.

정부는 참사의 고위 책임자들이 아닌 말단 인사들의 ‘꼬리자르기’식 처벌과 사고와 재난 발생시 진상규명 특별법안을 요구하는 여론을 거부하는 등 책임 떠넘기기와 외면을 일삼았다. 

아울러, 정치권 인사들은 참사 유족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단 정치적 문제로 쟁점화시켜 당파싸움에 이용하는 행태가 만연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을 고치지 않는다면, 재난과 사고로 인한 참사는 계속해서 한국 사회 곁에 머물며, 시민은 안전하지 않은 사회를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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