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훈 칼럼] 그대, “주은래의 6無”를 아시나요
[백병훈 칼럼] 그대, “주은래의 6無”를 아시나요
  • 백병훈
  • 승인 2022.08.23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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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미래를 향해 질주해야 할 이 순간, 국가사회의 지도층이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위기란 옛것이 지나갔는데도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때, 지금 딱 맞는 말이다. 그래서 왜 우리는 이웃나라와 같이 존경받는 지도자를 가질 수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중국의 격동기에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던 주은래(周恩來, 1898~1976). 그는 중국의 정치가, 혁명가, 정치 지도자, 사회주의 운동가였다. 강소성 출신 그는 천진 남개대학을 거쳐 일본 와세다 대학과 메이지 대학, 그리고 프랑스 유학을 마쳤다. 죽어서도 그를 모택동보다 더 존경받게 만든 것을 세상 사람들은“주은래의 6無”라고 부른다. “작은거인”주은래, 그는 무엇을 가지지 않았을까. 첫째, 사불유회(死不留灰). 그는 죽어서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
1976년 1월 주은래가 사망한 후 팔보산에서 화장을 했다. 추도회가 끝난 후, 부인 등영초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가 생전에 유골을 남기지 말고 대지에 뿌려달라고 했다는 얘기를 전했다. 한 때 세계를 흔들었던 영웅 주은래의 유골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대학을 다니고 혁명을 시작했던 천진을 거쳐 황하강 입구까지 농업용 비행기를 타고 바다와 하늘에 회색의 가루로 뿌려졌다. 유골이 없으므로 반듯한 유택이나 위풍있는 비석도 당연히 없었다. 둘째, 생이무후(生而無後). 그는 살아서 후손을 남기지 않았다. 후손을 잇는 것은 인간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는 후손을 두지 않았다. 부인 등영초는 지하투쟁 과정에서 건강을 많이 해쳤다. 그는 권력, 직책, 재능을 모두 갖추었고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사모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반면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열사들의 자손들을 진심을 다해 보살폈다. 총리를 지낸 이붕은 그의 양자였다. 연안 시절 그는 애국열사들의 자녀들을 소련으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직접 소련에 가서 스탈린과 협상하여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합의에 도달했다. 아마도 그것은 당시 세계에서“가장 큰 두 사람의 가장 작은”합의였다. 셋째, 관이무형(官而無型). 그는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동서고금 이래 높은 관직은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그는 외교나 공무를 수행할 때는 관리였지만, 일상생활에서는 보통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최초의 평민재상이었다. 어느날 해외를 방문했을 때, 속옷이 헤어져 대사 부인이 옷을 안고 돌아오면서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총리의 셔츠는 여러번 꿰맸고 흰색 칼라와 커프스는 여러번 고쳤고 잠옷은 이미 원사처럼 닭아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고급 호텔에 묵어도 항상 반짇고리 상자를 가지고 다녔다. 사람들은 이것이 일급 비밀문서 상자라고 생각했다. 이 전용 상자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영혼이 잠겨 있었다. 넷째, 당이무사(黨而無私). 그는 당에 있으면서도 사사로움이 없었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당은 있게 마련이다. 이익이 맞는 사람끼리 당을 이룬 뒤에는 사익과 권력을 취하고 영화를 취한다. 그러나 그는 당과 막강한 권력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평생 청념하고 정직하며 공평했다. 그의 막내 동생은 가능한 한 낮은 직책으로 내무부에서 일자리를 배정받도록 지시했고, 동생이 아파서 일을 할 수 없게 됐을 때는 퇴직을 지시했다. 가족과 친척들에게는 엄격한 10개의 가족규칙을 정해 놓고 있었다. 그는 항상 자신을 인민의 종으로 여겼다. 다섯째, 노이불원(勞而不怨). 그는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았다. 주은래는 혁명사업과 국가건설 과정에서 많은 고생을 했다. 그의 업무량은 당시 당원들 중 가장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도 한마디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 1938년, 오른팔을 다쳤다. 두 번의 치료가 잘못돼 소련으로 가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의사는 치료를 위해 상당기간 머물 것을 권했지만 시국이 위급하다고 서둘러 귀국했고, 마침내 팔이 곧게 펴지지 않는 장애를 남겼다. 문화대혁명의 광란에서 간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어떤 휴식의 기회조차 갖지 않았다. 여섯째, 사불유언(死不留言). 그는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1976년 방광암으로 그가 사망하기 전에 모택동도 매일 한 번씩은 총리의 병세를 물어보고, 부인도 항상 병상을 지켰다. 당시 혁명원로들 중 유일한 생존자 섭검영 원수는 백지를 비서들에게 나누어 주고, 혹시 총리가 무슨 말을 하면 하나도 빼먹지 말고 기록해두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망 후에 받아본 백지는 원래 그대로 상태였다. 그라고 어찌 남기고 싶은 말이 없었겠는가. 후일의 분란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해방 후, 직원들은 그가 한시도 짓고, 달필로 공문서 표지를 직접 쓰고 변경했던 것을 회상했다. 그러나 글을 쓰고는 찢어 종이 바구니에 던지곤 했다. 그는 당의 결정과 규율에 따라 행한 일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고백하고 남기지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주은래의 “6無”는 세상을 향해 자신을 버린 무한한 이타적 사랑이었다. 해방전쟁 기간 국민당을 포함한 숱한 적들은 그의 인간미에 매료되어 정치적으로 중국공산당에 투자했다. 1954년 미국의 델러스 국무장관을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만났을 때나, 닉슨 대통령을 중국대륙으로 끌어들일 때 그는 관대함과 자신감으로 그들을 사로잡았다.“그는 많은 적을 가질 수 있었지만, 개인적인 적은 없었다.”다는 말이 그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다. 그에 대한 끝없는 추억과 짙은 감동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주은래는 지금도 중국인의 가슴 속에 영원한 총리로 남아 있다. 우리도 그런 지도자를 갖고 싶다.

백병훈 약력

건국대학교 비교정치학 박사 국가연구원 원장 프라임경제신문 사장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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