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로렌스의 무용담은 그가 죽고 난 후 27년 뒤“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로 부활했다. 전 세계 영화팬을 감동시켰고“세기의 명화”라는 영광이 주어졌다. 그러나 로렌스에게는 아랍의 영웅이라는 칭호와 함께 아랍의 영혼을 훔친 사람이라는 비판이 주어진다. 로렌스의 일화만큼 진실과 거짓 논란이 컸던 경우는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렇다. 로렌스는 1888년, 아일랜드 귀족가문의 부친과 야반도주했던 교사출신 스코틀랜드 아가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귀족 신분이면서도 서자라는 불명예는 그의 인생에 늘 어두운 그림자가 됐다. 그래서인지 음습한 북웨일즈를 떠나 태양이 작열하는 아랍의 광활한 사막을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가족과 함께 옥스포드에서 소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다. 고고학에 큰 관심이 있었던 로렌스가 곳곳을 다니며 보여준 유물발굴의 열정은 영국 애쉬몰리안 박물관장 호가스(D.G. Hogarth)의 눈에 들어왔다.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다. 호가스는 그를 옥스퍼드대학 지저스칼리지에 추천했다. 옥스퍼드대학이 영국의 중동정책 산실이었음은 훗날 해제된 비밀문서“호가스의 일기”에서 확인된다. 호가스는 대영제국의 중동전략 책임자였다. 호가스의 뒤에는 해군장관 처칠이 버티고 있었고, 처칠은 중동의 산업적, 군사전략적 가치를 누구보다 잘 꿰뚫고 있었다. 이후 로렌스는 호가스의 지원으로 중동을 수차례 오고갔다. 대학 시절, 중근동의 십자군 성(城)에 관한 졸업논문을 제출한다. 아랍의 군사지형 연구가 필요했던 육군정보부가 그를 주목했다. 정보요원으로 훈련받은 로렌스는 호가스 지휘하의 육군정보부“아랍국”에 들어가 카이로를 거점으로 아랍 세계에 뛰어 든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로렌스는 롤스로이제 장갑차나 낙타를 타고 아랍인들과 더불어 사막을 질주한다. 로렌스와 아랍해방군은 1917년 아카바를 함락시키고 다음 해에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전후 이라크의 왕으로 등극한 파이잘 왕자는 전쟁 기간 그와 함께했다. 로렌스는 아랍인을 선동하여 터키와 독일의 동맹관계를 파기시켰고, 아랍 진출을 노리던 프랑스와 협상하여 막대한 매장량의 유전(石油)과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분열된 아랍을 통합해 시리아의 수도를 점령한 로렌스는 아랍민족으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는다.“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불멸의 칭호가 뒤따랐다. 그러나 아랍민족 독립의 순간, 유럽열강은 아랍을 배신했다. 이미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사이쿠스피코 조약”을 통해 전후 아랍영토 분할을 비밀리에 체결했다. 아랍에게는 민족해방을 거짓 약속했다. 로렌스를 앞세워 아랍해방군을 이용한 것이다. 로렌스는 이들에 항의하고 아랍민족의 단결을 호소하면서 아랍민족회의를 만들고자 했지만 좌절당했다.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그는 본국 소환명령을 받고 돌아가 1919년 7월 31일에 중령으로 제대한다. 여기까지가 로렌스 신화의 1막이다.아랍의 영혼을 훔친 로렌스
로렌스는 종전 후에야 자신이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주장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모든 진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데 있다. 아랍을 사랑한 그가“나는 신념에 근거하여 기만과 도박을 했다.”고 쓴 문서가 있다. 한편으로는 양심의 가책도 느꼈을 것이다.“이제 이 연극을 끝내고 싶다”는 일기의 기록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조국의 편에 섰다. 그는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라고 아랍을 압박했고 심지어 아랍인을 잘 다루는 것에 대한 책도 썼다. 그런 로렌스가 귀국 후 대영제국 훈장 수여를 거절한다. 왜 그랬을까? 지성인의 한 사람으로서 아랍민족에 대한 미안함, 속았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혼란스럽게 교차했던 것은 아닐까? 그는 상심 속에 영국 남부 크라우즈힐의 초라한 집에 은거해 살았다. 그러다 1935년 오토바이 전복사고로 사망한다. 47세의 젊은 나이였다. 위험한 코스가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고, 사고 직전 검은색 차가 빠져나갔다는 증언도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그의 사망에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다. 그리고 모톤교회의 작은 묘지에 묻혔다. 그는 작열하는 사막에서 태양의 아들처럼 살다가 사막의 바람처럼 갔다. 그의 사망에 처칠과 영국 국왕은 최고의 애도를 표했다. 그런데, 그는 왜“미심쩍은”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삶을 마감하고 그 삶을 내세와 바꿔야만 했을까? 진실의 단초가 하나 있다. 영국과 아랍 국가들은 그가 너무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는데 동의한다. 생전에 보관했던 수많은 문서들은 엄격한 감시를 받았고, 사망 후 대량 파괴됐다. 밝혀지는 것이 부끄러운 비밀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특별한 일화가 있다. 로렌스가 죽기 13년 전, 정보장교 출신인 그가 놀랍게도 자진해서 다시 사병이 된다. 전후, 괜찮은 공직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J. H. 로스라는 이름으로 비밀리에 입대해 공군 일등병이 됐는가 하면, 탱크부대의 사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사막의 아픈 추억이 남긴 통절함을 현실에 부딪쳐 날려버리고 싶었던 그 다운 행동은 아니었을까? 로렌스가 사망한 후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는 그를 동경하여 베트남으로 향했다고 한다. 로렌스를 추억하며 식민지약소민족 저항운동의 대열에 오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랍 사람 슐레이만 무서에 주목한다.“아랍인이 본 로렌스”를 쓴 그는 로렌스 신화는 유럽인이 조작한 허상이고 역사왜곡이며, 아랍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 로렌스는 아랍을 이용했던 스파이였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영화가 나온 지 4년 뒤의 일이다. 여기까지가 로렌스 신화의 2막이다. 이처럼 로렌스 신화의 뒷켠에는 모든 것이 조작된 영광이라거나, 그가 식민지 시대의 꼭두각시로 희롱 당했다는 평가가 있다. 과연 그는 아랍의 영혼을 훔친 사람이었을까? 아랍을 사랑한 그의 행동이 오늘날 끊임없는 중동분쟁의 씨앗이 될 줄을 그는 상상이나 했을까? 조국과 아랍의 경계(程度)에서 상심하고 방황했을 그를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변함없는 진실은 로렌스가 가로질렀던 광활한 사막은 서구열강이 각축을 벌였던 식민지역사의 씁쓸한 무대였다는 사실일 것이다.백병훈 약력
건국대학교 비교정치학 박사 국가연구원 원장 프라임경제신문 사장 한국정치심리공학회 회장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