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경제리뷰] 대항해 시대 개척 ‘포르투갈’, 왜 밀렸나
[역사속 경제리뷰] 대항해 시대 개척 ‘포르투갈’, 왜 밀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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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0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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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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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포르투갈은 유럽 서쪽 끝에 위치하면서 대서양 바다를 접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일찍부터 대서양 항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오스만 제국이 확장하면서 실크로드를 통한 동방으로의 무역이 사실상 힘들어지게 되면서 항해를 통해 인도로 나아가는 항로를 개척해야 하는 숙제를 유럽이 안고 있었고, 그것을 처음으로 개척한 나라가 포르투갈이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이내 대항해 주도권을 다른 나라에 빼앗기게 됐다. 그것은 ‘인구’와 ‘국내 산업’ 때문이다.

대항해 시대 개척

포르투갈은 후추 등 향신료를 얻기 위해 인도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해야 했다. 육로는 막혔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 항로를 개척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15세기 초 엔히크 왕좌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탐험대를 보냈고,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하고,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했다. 이런 이유로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더불어 세계를 분할 할 정도로 해양 강국으로 떠올랐다. 주요 식민지로는 브라질, 아소르스 제도, 모잠비크, 앙골라, 상투메 프린시페, 카보베르데, 기니비사우, 동티모르, 마카오 등이 있었다.그야말로 전세계에서 포르투갈령이 아닌 곳이 없을 정도로 세계를 호령했던 국가이다. 포르투갈은 해안 거점 지역에 석조 요새를 건설하고 대포를 설치함으로써 원주민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는 방식으로 해서 영토를 넓혀나갔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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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인구가 빠져 나가

그런 포르투갈이 갑작스럽게 위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인구가 해외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16세기 포르투갈 인구는 100만명 정도였다. 문제는 식민지가 많아지면서 군인과 선원들이 해외 원정에 동원돼야 했다. 그로 인해 포르투갈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 왕실 역시 무역을 통해 수입이 늘어나면서 원양 교역에 집착을 하게 됐다. 이로 인해 국내(포르투갈) 산업은 황폐되기 시작했다. 즉, 국내 산업은 주로 소비 산업이 발달하고, 원앙 교역을 통해 들어온 물품을 소비하는 그런 산업이 된 것이다. 이는 돈을 벌기 위해서는 해외로 나아가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군인이 되거나 선원이 돼서 배를 타는 것이 가장 좋은 돈벌이가 됐다. 문제는 원양 교역의 성공률이다.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했다고 해도 원거리 항해에서 배가 난파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즉, 투자 대비 수익이 크지는 않은 것이 실정이다. 배가 항구에 무사히 들어온다면 엄청난 수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배가 난파되기 일쑤였기 때문에 배가 항구로 돌아올 때까지 노심초사해야 했다. 다시 말하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었다.
사진=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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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전쟁에서

포르투갈 왕실로는 배가 난파되는 손실을 메꿔야 했고, 식민지가 늘어나면서 식민지 전쟁 비용 역시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포르투갈이 석조 요새를 만들어 원주민의 공격을 방어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보니 식민지를 다시 원주민들에게 빼앗기는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났다. 식민지를 빼앗겼다는 것은 해상 무역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포르투갈 왕실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것을 말한다. 포르투갈 왕실의 수입이 줄어들게 되면 역시 식민지 전쟁에서 패배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면서 포르투갈의 위세는 급속도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 틈을 영국이나 네덜란드 등이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포르투갈의 인도양 제해권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푸르투갈의 교훈을 얻어 동인도 회사를 만들고, 식민지를 확장하고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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