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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작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영결식은 장엄했다. 그 마지막 인상 깊었던 장면은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을 입은 어느 사람이 백파이프를 연주하면서 역사의 공간으로부터 홀연히 사라져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에는 여의도로부터 연기처럼 사라져야 할 대상이 있다. 시효도 유통기간도 끝난 국회의원이라는 이름의 한국정치인들이다.
그래서인지 마침, 제3신당론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신당에 합류할 대통령 깜이나 스타가 없다, 민심이 뜨겁지 않다, 2류 인사들이 모일 것이다,
반짝했다 끝날 것이다가 그것이다. 이처럼 제3신당론은 관심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늘 거대 양당체제의 벽을 뚫지 못하고 산화(散花)해야 했다. 그런데, 최근 정치판에 이상신호가 감지된다. 여야 정치권의 계속되는 헛발질로 국민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는 것이다.
사회의식에도 변화가 감지된다. 권력의 주인이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라는 자각이 도처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중간지대 유권자의 선택이 정치판도를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산술계산에 젊은세대들이 눈을 떴다. 놀라운 상황의 변화다. 문제는 회의적 시각이라는 걸림돌이다.
무엇이 걸림돌인가?
걸림돌은 치워달라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인물이 없어 불가하다는 생각은 현실면피의 투항적 발상이다. 인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인재를 키우지 않았던 것이다. 권력은 혼자 가질 때 더 오래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들이다. 그리하여 오로지 다음 공천을 위한 의정활동에 매달려 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그들이 좌우파 분열에 대해 우려할 자격은 없다. 분열에 대한 책임은 기성 정치권에 있다. 자유우파세력은 더 이상 국힘당의 식민지 농장이 아니다.
호각만 불면 거리로 뛰쳐나와 호응할 것이라는 생각은 벌써 끝났다. 영원히 호남을 부여잡아야 한다는 진보좌파세력의 간절함도 허상이 됐다.
제3신당의 봉화불이 애국의 성지(聖地) 광주호남에서 불 붙더라도 그것은 민주당의 책임이다. 믿었던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언제든지 지지를 철회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이 대중이기 때문이다. 대중, 그들은 옛 동지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적을 찾아낸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념의 편 가르기를 한다면 더 나쁜 정당이 될 것이다. 진보와 보수로 편 갈라“표”를 구하는 것은 대의(大儀)정치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충돌은 역사의 필연이 아니라 당파주의가 낳은 사생아 일 뿐이다. 역사발전에서 진보와 보수의 가치는 각자 아름다운 것이며, 같이 어우러질 때 더욱 빛난다.
한국은 좌, 우 대결구도 속에서 정치를 해왔다. 그런데, 정치는 민심의 바다 위에 뜬 배와 같다. 민심은 좌나 우를 평가하고“표”로 단죄한다. 제3신당 정치는 걸림돌을 뛰어 넘어 타는 목마름으로 민심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이제는 정치판 혁명의 “돌풍”인가?
제3의 공간은 각성된 소수 사람이라는 점(點)과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라는 긴 선(線)이 만들어 낸다. 제3세력은 그 공간을 새로움으로 채워야 할 사명을 가슴으로 떠안았다. 더 늦기 전에 한국정치의 새로운 세력을 조직화하자. 이는 구국의 십자군운동이며 대한민국 혼(魂)의 일대각성이다.
“거대양당 심판론”이 한국정치 재탄생의 물꼬를 틀 수 있다. 그러므로 국민이 정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정치가 국민을 버렸다는 사실에 동의하는 초야의 인재들이 구름같이 모여 양당구도에 균열을 만들고 애국심을 놓고 경쟁하는 쟁쟁한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 한국정치의 새로운 대안세력의 등장인 것이다. 문제는 방법론이다.
러시아의 혁명가 V레닌은 1902년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글을 썼다. 이 작은 팜프리트가 러시아혁명을 지도하는 방향을 제시해 볼쉐비키혁명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직업적 혁명가의 지도하에 대중을 이끌 전위정당(前衛政黨) 건설과 조직의 역사적 필연성을 설파했다.
그 결과 전체인구 3,200만 명 중 0.74%에 불과한 23,000명으로 제정러시아의 절대권력을 타도했고, 세상을 뒤집어엎는데 성공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라 하여도 비상한 생각과 비장한 행동이 따르면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긴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를 내서 새로운 정치,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거침없는 행진에 나서자. 악의 행진을 여기서 멈추게 해야 한다. 희망의 푸르고 아름다운 반란을 조직해 들에 난 야화(野火)가 들판을 불태워 버리듯 ‘돌풍’을 일으키자.
‘뒤집어엎기’가 시작되면 결코 찾잔 속의 태풍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혁명’과도 같은 결기가 필요하다. 혁명의 원인은 평등에의 욕망 즉, 기회의 박탈이다. 불평등과 좌절당한 기회가 사회지배계층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눈치 채고 그것이 정의롭지 못한 정치와 제도권에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 혁명의 무대는 마련된다. 이것이 푹풍 전야 돌풍의 전주곡이고, 힘의 원천이며, 혁명의 사회학이다.
가진 자는 지갑을 열고 지혜 있는 자는 혜안을 내놓자. 젊은이는 앞장서는 행동으로 나라의 미래를 신탁하자. 노인은 경륜을 바치고 없는 자는 없는 것에 대한 간절함을, 유명인은 얼굴을 내놓자. 비주류와 소외된 자는 사회 불의에 대한 통절함을, 신앙인은 나라의 안녕을 바라는 애틋함으로 기도하자. 기업인과 소상공인은 북방대륙경제에 대한 꿈을, 탈북민은 고향에의 애절함을 담아내자. 소수 정당은 연대와 외침을, 제도권 밖 1인 정당은 공동전선을, 그리고 사회의 빛과 소금인 언론은 양심의 끈을 놓지 말자.
그런 뜻에서 필자가 몇 년 전에 호소했던 마지막 한 문장을 다시 끄집어 내 본다.
“역사의 길가에는 멈춰야 할 때 멈추지 않아 파괴된 제국(帝國)의 폐허와 지도자들의 잔해가 가득하다. 국가의 소멸, 민족의 소멸, 문화의 소멸은 어김없이 그다음 순으로 이어져 왔다. 이것이 역사다. 누가 조국의 편에 섰고, 누가 애국이며, 누가 위선인지는 아주 먼 훗날 기록될 ‘대한민국흥망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대 어느 편에 설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