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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리뷰] 우리 사회는 정의(正義)에 목말라 있다. 정의를 앞세워 자신만 옳다고 믿고 시기하고 공격하는 정의감 중독사회이다. 정의란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로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고 동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
그러나 정의의 질적 수준이 다양하고 이상적인 정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많아 타협점에 이르기가 어렵다. 결국,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다.
마이클 샌델의 저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제시한 “철로를 이탈한 전차”는 대표적인 정의 딜레마이다. 이 사례는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정치철학의 필요성과 주장일 뿐, 정의의 정당성에 풀어줄지는 미지수다.
“당신은 시속 100Km로 달리는 전차의 기관사이다. 그런데 갑자기 전차의 브레이크가 고장났다. 이대로는 철로 위에서 일하고 있는 인부 다섯 명을 덮친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첫 번째 상황. 전차의 경로를 비상 철로로 바꾸면 철로 위에 있는 행인 한 명만 죽는다. 선로를 변경할 것인가? 두 번째 상황. 당신은 다리 위에서 전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보고 있다.
마침 당신 옆에는 덩치 큰 행인이 서 있었다. 행인을 밀어서 기차에 부딪히게 만들면 인부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는 상황이다. 행인을 밀어 인부 다섯 명을 구해야 하는가? 사람들에게 두 상황에 대해 질문을 던졌을 때, 대부분 첫 번째 상황에서는 선로를 변경하겠다고 답한다.
두 번째 상황에서는 행인을 밀어 넘어뜨리지 않겠다고 답했다. 샌델은 여기서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추론해보면 두 번째 상황에서 행인을 밀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 자체가 고귀한 목적이고,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주인으로 다른 사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을 웅변해 준다. 첫 번째 상황에서 선로를 바꿔 1명은 비록 억울하게 죽지만 그 대신 5명을 살린다는 대의명분에 수긍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가치가 합리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에는 인간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 생명을 단순히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정의도 이론, 진리라고 보기보다는 대다수 사람들의 이성적 선택에 달려있다.
내용 없는 사고는 공허하며, 진리 없는 직관은 맹목적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 개입과 보완책을 주창하는 거시경제학 대가 케인즈의 ‘미인투표 이론’은 흥미롭다.
미인 대회에서 투표로 미인을 뽑을 때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심사위원들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고른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주식시장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투자자들은 수많은 투자 기법들을 알지만, 시장 소문이나, 시장 주도주, 인기주를 선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