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 지난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광역시(당시 광주시)와 전라남도 지역의 시민들이 벌인 민주화 운동이 벌써 39주년을 맞이했다.
5·18광주민주화 운동은 ‘광주민중항쟁’, ‘광주시민항쟁’, ‘광주항쟁’, ‘광주의거’ 등으로 불리우나, 과거에는 신군부와 관변 언론 등에 의해 ‘광주소요사태’, ‘광주사태’, ‘폭동’ 등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계엄령 철폐와 전두환(全斗煥)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의 퇴진, 김대중(金大中) 석방 등을 요구했다.
1980년 발발 당시에는 극소수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광주사태)으로 규정됐다가 제6공화국 출범 이후인 1988년 4월 1일 민주화추진위원회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정식 규정됐다.
이후 같은 해 11월 제13대 총선(4월 26일)의 소산인 여소야대 국회에서 사건규명을 위한 국회 광주특위청문회가 개최됐다.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간 군사독재가 통치능력을 상실한 일련의 사태는 1979년 10월 이후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같은 해 10월 4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은 국회에서 의원직을 제명당하자 10월 15부터 10월 20까지 부산·마산 등지에서는 부마항쟁이 일어났고, 이의 해결을 둘러싼 노선대립으로 10월 26일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했다.
10·26사태의 사후 수습과정에서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부상하였으며, 12·12사건의 하극상을 통해 군부를 장악했다.
1980년 2월 29일 김대중 등이 복권됐으나 그 해 봄, 신군부는 최규하(崔圭夏)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군부의 재집권 야욕에 대한 국민적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다가 강원도 사북사태(舍北事態, 4월 19∼4월 24일)로 대표되는 생존권 문제로까지 확산됐다.
5월 1일 대학의 학원문제가 교외로 확산되면서 5월 13일부터 5월 14일에 걸쳐 서울·부산·대구·광주 등 37개 대학에서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5월 15일에는 서울역에서 시위가 발생하는 등 학생시위는 서울시가지를 거의 마비시키는 등 야간까지 지속되어 사태가 절정에 달하면서 신군부 세력을 위협했다.
5월 16일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당분간 시국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결정하고 가두시위를 중단하면서 소강상태에 돌입하는 듯하였다.
5월 17일 신군부 세력이 배후에서 조종하던 비상국무회의가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지역에 한정됐던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하는 조치인 계엄포고 10호(17일 24시에 발효: 각 대학 휴교령 포함)를 밤 9시 40분에 의결했다.
이후 밤 11시 40분에 발표하면서 밤 11시를 전후한 시점부터 김대중·김종필(金鍾泌)이 연행되는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및 소요조종 혐의자, 학생 시위 주동자가 체포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이러한 배경 아래 5월 18일부터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