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필사에서 시작하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다. 우리말 단어나 문장을 쓰지 못하는 이가 없건만 쓰고자 하면 왠지 부끄럽고 자신이 없어지는 막막해 진다. 글쓰기는 모험이다. 시작은 좌충우돌할지 모르겠지만 이 모험을 통해 경이로움을 맛보기 때문이다. 수많은 글쓰기 마법사들이 있고 강의와 훈련이 있지만 그저 미리 쓴 작가의 글을 따라 걸으면 된다. 신경숙 작가는 필사를 통해 고수가 되 ㄴ예다. 그는 산문집 ‘아름다운 그늘’에서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을 필사로 보냈다 그 시작은 서정인의 ‘강’이었다.관찰력으로 생생하게 써라
화가가 그림을 잘 그리는 이유는 보통사람들보다 세밀하게 보기 때문이다. 화가 들라크루아는 “5층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바닥에 닿기 전까지 그를 그려내지 못하면 걸작을 남길 수 없다”고 말했다. 5층에서 떨어지기 전에 순식간에 특징을 보는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쥐디트 페라뇽의 ‘나의 형 빈센트 반 고흐’ 자서전에 이런 말이 있다. “난 태양을 그릴 땐 사람들에게 태양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하는 것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 밀밭을 그릴 땐 밀알 안에든 원소 하나하나가 영글어 터지는 순간을 사과를 그릴 땐 사과즙이 표피를 밀고 나오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사과 씨들이 결실을 맺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려 몸부림치는 것을 느끼게 만들고 싶단 말이야”사물을 생생하게 보고 느낀 것을 고호가 알려준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는 ‘명상록’ 첫 문장에서 글의 목적을 알 수 있다 “나의 할아버지 베투스 덕분에 나는 순하고 착한 마음씨를 갖게 되었다.” ‘명상록’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글이 아니라 자신을 경계하고 삶을 교정함으로써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 틈틈이 메모해 둔 비망록이다. 로마의 황제로서 더욱 더 자신을 엄격하게 점검하고 황제로서 책임져야 하는 법과 정의를 자신의 이성 속에서 드러내고 실천코자 한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글쓰기의 대선배로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나 자신이 알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였습니다.”(‘고백록’ 4권 4장)라고 털어 놓는 겸손을 느낀다. 그에게 주체는 ‘나’가 아니라 ‘신’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루소는 평범한 시계공 아들로 태어나 이제 신이 아니라 인간을 앞세우기 시작했다. “나는 한 인간을 사실 그대로 털어놓고 세상 사람들 앞에 내보일 작정이다. 이 인간은 나 자신이다.”(루소 ‘고백록’) 같은 이름의 고백론이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 사이에는 이렇게 건널 수 없는 강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자서전의 매력이기도 하다. 자서전은 인생을 정리해야 할 시점에 있는 노년층에게 한정된 과업이 아니다. 인생의 첫발을 내딛는 젊은이,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사람, 새로운 삶의 접근을 통해 자신만의 디자인이 만드는 전 세대를 아우르는 필요한 작업인 것이다. 책을 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나의 역사를 마치면 인생이 쉬워진다. ” “나의 역사를 쓴 이후에는 삶이 달리 보인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