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왕 인조, 왕위를 차지
인조반정이 불러 온 나비효과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01년 전인 1623년 4월 11일 조선 능양군(인조, 1595~1649, 향년 53세)이 광해군(1575~1641, 향년 66세)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한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조선 왕조의 쿠데타였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능양군의 명분은 광해군이 영창대군(1606~1614, 향년 7세)을 살해했다는 것과 인목대비(1584~1632, 향년 47세)를 대비에서 폐하고 서궁(덕수궁)에 유폐시킨 사건, 그리고 명·청 교체기 명나라와 신의를 저버리며 중립외교(명과 청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펼친 게 주된 이유였다.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광해군 묘와 문성군부인 류씨 묘 (사진출처 국가유산포털)
경기도 남양주에 위치한 광해군 묘와 문성군부인 류씨 묘 (사진출처 국가유산포털)

먼저 광해군은 세자 시절인 임진왜란 때 명나라로 망명까지 고려한 아버지 선조(1552~1608, 향년 55세)와 달리, 왕실의 일원으로 분조를 이끌며 선조를 대신해 직접 왜군과 싸우며 국난극복을 위해 살신성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전란으로 뒤숭숭한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고 주변으로부터 후대 왕의 재목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새로 선조의 중전이 된 인목대비가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낳았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건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세력에게 영창대군은 걸림돌 같은 존재였다. 선조의 적자이기에 광해군의 정통성에 부정이 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광해군은 선조의 계비(원래 왕비가 사망 또는 폐출 시 맞이하는 새로운 왕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귀양 보내 죽이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러한 폐모살제(어머니를 폐하고 동생을 죽인다)는 유교가 근본인 조선에서 인조반정 세력에게 빌미가 됐다.

또 하나 반정의 빌미는 광해군이 펼쳤던 실리외교가 명나라에 신의를 저버리는 일이라며 이를 비판한 것에서 기인했다. 

그렇게 1623년 4월 11일 김자점(1588~1652, 향년 64세), 이귀(1557~1633, 향년 76세) 등 서인 반란 세력이 군사 1000명을 이끌고 창덕궁을 기습해 정변을 일으켰다. 이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을 인종으로 추대했다. 이게 바로 인조반정이다.

반정 이후 광해군이 물러나자 서인(붕당의 당파, 인조 이후 주도권을 잡음)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이에 붕당정치 역시 본격화됐다. 결국 인조반정은 당쟁이 불러온 권력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광해군의 폐모살제 역시 조선 역사에서 왕의 혈족이 왕권에 도전할 기미가 보일 때 죽임을 당하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명군으로 불린 태종 이방원(1367~1422, 향년 54세) 역시 왕자의 난으로 왕실 혈족 사이 피를 튀기며 권력 투쟁을 했다. 세조(1417~1468, 향년 50세)는 심지어 자신의 조카인 단종(1441~1457, 향년 16세)을 죽이기까지 하며 왕위에 올랐다.

다시 정권을 잡은 서인과 그들이 내세운 왕 인조는 친명반청이란 시대착오적인 외교정책을 펼쳤다. 그 정책은 병자호란(1636)을 야기했고 결국 인조는 삼전도에서 그 대가를 호되게 치렀다. 인조는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3번 절하고 9번 이마를 땅에 찧는 삼궤구고두례를 해야 했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는 청국에서 인질 생활을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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