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직으로 백의종군한 이순신

인천투데이=현동민 기자│오늘로부터 427년 전인 1597년 4월 12일 한국사 최고 명장이자 조선을 구해낸 불세출 영웅, 충무공 이순신(1545~1598, 향년 53세) 장군이 암군 선조(1552~1608, 향년 55세)와 무능한 장군 원균(1540~1597, 향년 57세)의 모함을 받아 파직됐다.

당시 암군 선조는 무능으로 조선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조일전쟁 고통에 빠트렸다. 선조는 백성과 수도 한양을 버리고 명나라까지 망명을 고려할 정도로 무능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사진출처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충무공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사진출처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정보원)

그러한 선조가 이순신 장군에게 명령을 내렸다. “곧, 가토기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이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즉시 출격하여 가토 기요마사를 생포하라”는 명령이었다. 당시 가토기요마사(加藤清正)는 조선을 침략한 왜군 선봉장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건 왜군의 계략이었다. 왜군은 부산을 침공한다는 거짓 소문을 흘려 조선 수군이 부산 앞바다 길목에 나오면, 곳곳에 매복시킨 함대로 공격해 조선 수군을 섬멸하려 했다. 그리고 선조가 생포 명령을 내린 가토기요마사는 이미 서생포(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에 왜군이 쌓은 왜성)에 들어온 후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러한 왜군의 계획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 흔히 이 장군이 일방적으로 선조의 명령을 거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장군은 이미 왜군의 흉계임을 알고 있었다. 다만 임금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기에 조선의 명령을 받들어 부산포에 출전했으나 전투를 벌이진 않았다. 이 장군은 출병해서 왜군을 압박하고만 있었다.

졸장과 암군의 미움을 산 충무공

그러나 무능한 장수의 상징인 원균은 '애초에 완수할 수 없었던 임무를 이순신 장군이 완수하지 못했다'며 이순신 장군을 모함하는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렸다.

암군 선조는 상소를 받고 원균의 말을 전부 믿었다. 선조에겐 전세가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히 파악할 능력이 없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로 이순신 장군을 파직시키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하고 말았다.

이 장군이 파직되자 일전에 이 장군을 전라좌수사(전라도 지역 수군 사령관)에 추천한 적이 있는 서애 류성룡(1542~1607, 향년 64세)이 이를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선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이 장군의 파직을 반대한 사람은 류성룡뿐만이 아니었다. 도체찰사(전시나 변란이 발생했을 때 맡는 군사·행정 사령탑, 계엄사령관) 이원익(1547~1634, 향년 86세) 또한 이 장군 파직을 극구 반대하며 이 장군을 변호했으나 암군에겐 소용없었다.

그렇게 이 장군은 백의종군을 해야했다. 그 자리를 대신한 원균은 왜놈들의 유인 전술에 빠져 경남 거제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원균은 칠천량에서 지금으로치면 조선 수군의 핵심 전략 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판옥선 약 150척을 잃었고, 병사 7000여명을 잃었다.

이 장군이 애써 꾸린 조선의 무적함대는 원균으로 인해 바다로 대부분 수장됐다. 칠천량 해전에서 남아 돌아온 배는 12척뿐이었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칠천량 해전의 참패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에 복직한 이 장군에겐 남은 건 함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 장군은 소란스러운 조정과 선조를 향해 장계(신하가 왕에게 보고하는 문서)를 올렸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 이 장군은 단 13척(충무공이 조정에 장계를 올린 후 명량대첩 직전 백성들이 함선 1척을 가져와 총 13척이 됨)으로 전남 진도 울돌목(=명량)에서 세계사에서 전무후무한 신화를 썼다. 울돌목은 해남과 진도 사이의 거친 해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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