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의 귀국
여의도 공원은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공원로 69 소재 시립 공원이다. 초반에는 공항이었다. 1916년 일제가 여의도 비행장과 활주로를 만들었다.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아스팔트 활주로가 있었다. 항공기가 이착륙한 것은 1920년대부터이다. 광복 이후 김구 선생이 여의도 활주로를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지금도 김구 선생이 활주로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기념으로 비행기가 여의도 공원에 전시돼 있다. 여의도 활주로였지만 1971년 공군기지가 이전되면서 김현옥 서울시장이 ‘여의도 개발계획’을 수립하면서 원래 주거지역으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의도에 제방을 설치하면서 예산이 바닥나면서 청와대에서는 광장을 계획한다. 광활한 활주로는 광장으로 바뀌고 5.16 광장이라고 명명했다. 광장으로 삼은 것은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비상활주로의 개념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시의 김일성광장에 대응하는 성격도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독재정권들이 체제 선전을 위해 대규모 정치집회와 퍼레이드를 자주 개최하는데, 도심 한가운데 광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5.16 광장은 체제 선전을 위한 정치 집회와 퍼레이드가 자주 이뤄졌다.국풍81, 5.18 잊기 위해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풍81이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고, 전두환 정권이 탄생했다. 전두환 정권은 1981년 5월이 다가오면서 국민들이 5.18을 잊어버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에 TBC에서 열기로 했던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확대해서 국풍81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여의도광장은 물론 체제 선전에만 이용되지는 않았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방한 시 대집회라든가, 요한 바오로 2세도 방한 시 이곳에서 미사를 집전하며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를 시성한 적이 있다. 또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매년 국군의 날에는 대규모 열병식이 개최되기도 했다. 아울러 김대중 전 대통령 등 야당 정치인들도 여의도 광장에서 대규모 군중 집회를 열기도 했다.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500만의 군중이 모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130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250만이 모이면서 세를 결집하는 유세장이 됐다.(추산일 뿐이지 실제로 이 정도 규모는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다) 민주화운동 당시 노동운동, 농민운동, 학생운동의 단골 집회 및 시위 장소도 여의도 광장이었다. 다만 6.10 민주화운동 당시 주무대는 서울광장이었기 때문에 다소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평소에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되면서 자전거나 롤러스케이트를 마음껏 탈 수 있었고, 한강시민공원과 연결되면서 많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되기도 했다.아스팔트가 공원으로
1991년 사회에 불만을 가진 한 사람이 훔친 승용차를 몰아서 여의도광장에 돌진해서 어린이 2명이 사망하고 20여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아스팔트 광장이 군사정권의 잔재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이에 1994년 21세기 서울시 개발 플랜에서 여의도 광장을 뉴욕의 슨트럴파크, 런던의 하이드파크와 같이 도심권 공원으로 탈바꿈을 시켜야 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1997년 4월 10일 공원화를 위한 첫 삽이 떠올려진 이후 1998년 10월 31일부터 부분적으로 공개, 1999년 2월 서울특별시 시립공원인 여의도공원으로 완전히 개장됐다. 여의도공원은 한국 전통의 숲, 잔디마당, 문화마당, 자연 생태의 숲 등으로 나뉘어 있다. 여의도라는 특성상 여의도 지역에 근무하는 직장인들과 방문객들이 찾고 있는 공원이자 쉼터이기도 하며 주변에 여의도 증권가(街) 등 여러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