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리뷰=어기선 기자] 1961년 5월 16일은 박정희 소장을 비롯해 육군 장교들이 군사정변을 일으킨 날이다. 제2공화국은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고, 박정희를 수반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등장했다.
4.19 혁명 이후 민주주의가 싹트는 듯 했지만 장면 정부의 혼란으로 인해 결국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됐고, 18년 박정희 독재정권이 이어졌고, 그 뒤로도 전두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는 등 우리나라 민주화 역사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됐다.
4번이나 쿠데타 시도
박정희 소장은 5.16 쿠데타까지 4차례의 군사정변을 일으키려고 했고, 4번째에 성공을 한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만주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생활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고, 귀국 후 육군에 들어갔다. 그런데 셋째 형인 박상희가 대구 10.1 사건으로 경찰에 사살됐다.
이후 여수·순천 10.19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면서 이른바 숙군 대상이 됐다. 당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당원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에 숙군대상이 됐다.
수사 과정에서 남로당 당원이라는 사실을 시인했고, 군내 남로당 조직원 명단을 제공하고 그 공로로 숙군사업에 적극 협력한 점을 인정받아 사형을 면했다.
이후 백선엽의 추천으로 육군 전투정보과 등에 근무하면서 육군 8기들과 접촉하게 된다. 1952년 이용문의 주도로 군부의 이승만 축출 시도에 박정희가 참여했지만 미수로 끝나게 된다.
박정희 소장이 군사정변을 결심하게 된 것은 부산 군수기지 사령관으로 역임했던 시절이었다. 그해 5월 8일 거사일로 결정했지만 그해 4.19 혁명이 터지면서 일단 뒤로 밀려났다. 즉, 1960년부터 본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킬 준비를 한 것이다.
그 이듬해인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다. 왜냐하면 그날 대규모 시위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소장 등 군부는 일부 학생들이 정부에 대한 데모를 할 때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거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결국 1961년 5월 16일 새벽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장면 내각을 붕괴시켰다.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 얽혀
5.16 군사반란이 일어난데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다. 그것은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갈등이다.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민주당 사람이었지만 서로 앙숙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하야하고 장면 내각이 출범했지만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는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서로가 서로에 대해 비수를 꽂는 발언들이 이어졌고, 그것이 국민적 혼란을 부추겼다.
뿐만 아니라 4.19 혁명으로 자유당 독재정권이 무너지면서 각종 요구가 쏟아지면서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혼란이 있었다.
박정희 소장 개인적인 문제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여수·순천 사건에 연루되면서 남로당 가입 의혹이 계속해서 따라다녔다.
군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자가 군대 내에 계속 있는 것에 대해 꺼림칙하고, 그에 따라 숙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계속 터져 나왔다. 남조선로동당 전력이 계속 따라다닌 것이다.
군사정변 이후 지식인의 반응
군사정변이 일어난 후 지식인들의 반응은 의외로 군부에 호의적이었다. 물론 한창우 경향신문 사장 등은 정변을 비판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박정희 소장이 일으킨 군사정변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만큼 장면 내각이 민심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대 최고 지식인 중 한 사람이면서 박정희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을 계속해서 쏟아냈던 장준하 선생도 군사정변 초기에는 ‘군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전제조건 하에 쿠데타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지식인들이 군사정변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유는 장면 내각이 민심을 잃었던 것도 있었지만 당시 신생국들이 군부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것이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이나 일반 시민들도 비슷했다. 미8군 방첩대가 거리에 나온 구경꾼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열 명에 네 명 꼴로는 쿠데타를 지지했고, 두 명 꼴로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했고, 네 명 꼴로는 반대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4.19 혁명을 계승한 군사혁명이라면서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육군사관학교는 전두환을 중심으로 가두행진을 하면서 육사생도들도 군사반란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정희 소장은 군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18년 장기집권 하면서 군사정변은 그야말로 역사적으로 오점이 됐다.
가장 이해가 되지 않은 사람, 장도영
5.16 군사정변에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은 인물은 장도영이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다. 장도영은 장면 총리가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고 했지만 장도영 총장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 안심 시켰다.
그리고 5.16 군사정변이 터지자 진압도 아니고, 적극 가담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이유로 군사정변을 방조했다는 의혹이 일어났다.
장도영 본인은 멋훗날 자신의 다큐멘터리에서 군사정변 가담에 대해 적극 부인하고 나섰지만 세간에서는 적극 가담은 아니더라도 방조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장도영이 내세운 논리는 “아군끼리 피 흘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이기 때문에 5.16 군부 세력을 진압하려면 얼마든지 진압할 수 있었지만 진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쿠데타를 방조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당시 헌법상 국군통수권을 가진 윤보선 대통령이 유혈 진압을 거부한 상황이었고, 정부 실권을 가진 장면 총리가 도망가서 연락이 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장도영 총장 역시 할 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었다는 항변도 있다.
장도영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 장관 등으로 추대됐다. 하지만 그해 7월 2일 김종필에 의해 체포됐고, 숙청됐다.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