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본위제 폐지 선언
1971년 닉슨 대통령이 금본위제도 폐지를 선언했다. 이로써 달러 가치는 추락했고, 1970년대 내내 스테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이에 1979년 8월 미 연방준비제도 이사회는 스테그클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살인적으로 끌어올렸다. 고금리 정책은 무역적자의 심화를 이뤄냈다. 달러 가치가 오르면 다른 나라 화폐 가치가 떨어지면서 미국의 수입량이 증가하고 수출량이 감소했다. 대표적으로 일본이 엔화 저환율 상태로 인해 미국에 엄청난 무역흑자를 일으켰고, 경제대국으로 나아갔다. 1981년 취임한 레이건 대통령은 감세와 경기활성화 등 레이거노믹스를 펼쳤지만 반전의 카드가 필요했다. 결국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G5 재무장관들과의 회의를 통해 일종의 환율 조정을 진행한다.반일 감정도 한몫
플라자 합의를 이뤄내는데는 반일 감정도 한몫했다. 영화 백 투 더 퓨처에서 일본에 대한 동경도 잇었지만 미국 내에 반일 감정도 상당했다. 미국 제조기업들과 농민들은 강한 보호무역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요구를 했다. 레이건 대통령으로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달러 강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레이건 대통령은 G5 재무장관에게 요구했고, 결국 이날 회의에서 도출된 결과는 각국 정부 개입에 의한 환율 조정이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이 일본에 항복했다”는 환호를 내지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실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엔화 상승, 버블 경제로
날 합의 이후 엔화는 8.3%가 각각 상승했고[4], 이후 2년 동안 달러는 30% 이상 급락하게 된다. 이 달러 약세로 인해 미국의 제조업체들은 가격 경쟁력을 회복했고, 미국의 무역 적자도 크게 해소됐다. 다만 미국의 대일적자는 크게 해소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일본의 시장 개방이 제한적이고 일본인들의 폐쇄성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출이 감소했고, 성장률은 크게 떨어졌다. 이를 위해 일본 정부는 경기 부양책을 위해 금리 인하와 부동산 대출 규제 완화책을 내놓았다. 이로 인해 부동산과 주식시장에 엄청난 거품이 생기게 됐다. 한때 우스개 소리로 일본 도쿄 땅을 팔면 미국 전체의 땅을 구입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런 거품 경제가 결국 나중에 일본 경제의 침체기를 가져오게 됐고, 그런 침체기는 잃어버린 10년에 이어 잃어버린 20년, 잃어버린 30년 등에서 이제는 잃어버린 40년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한국 경제 성장도
플라자 합의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본의 대미 수출이 위축되면서 상대적으로 우리나라 공산품 수출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3저 호황까지 겹치면서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우리나라 물건이 해외에서 없어서 못판다고 할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이른바 오렌지족, X세대 등 과거 기성 세대와는 또 다른 세대가 출현하게 됐고, 그것이 문화적 바탕을 이뤄내면서 오늘날 K-한류의 밑바탕이 됐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