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 담판으로 얻은 강동6주
이에 993년(성종 12) 소손녕이이끈 거란군이 고려를 침공해왔지만 서희가 담판을 벌여 강동6주를 획독했다. 1010년(현종1)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2차 침입을 했지만 별 소득 없이 돌아갔다. 그 이후 계속해서 요나라 성종은 군사를 고려로 보냈다. 그것은 강동6주를 반환받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거란은 사신을 보내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지엽적인 충돌도 벌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거란군을 물리쳤고, 거란군은 돌아갔다. 이런 소규모 전투를 벌이던 중 자신감이 붙은 고려 조정은 거란 사신을 체포하고 억류하기까지 했다. 이에 대노한 요나라 성종은 몇 차례 지엽적인 공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공격이 실패하자 전면적인 침공을 준비한다.소배압 3차 침공 시작
1018년 12월 소배압은 10만에 달하는 정예기병을 이끌고 3차 침공을 시작한다. 강감찬 장군은 1만 2천의 기병을 차출해 흥화진 옆 삼교천 계곡에 매복시켰다. 거란 기병이 수도 함락을 목적으로 진격할 것으로 예상해 배치를 한 것이다. 거란군 10만이 삼교천을 도하하자 고려군은 쇠가죽으로 막은 둑을 터뜨림과 동시에 기병대를 출격시켜 승리를 거둔다. 흔히 귀주대첩하면 ‘수공(水攻)’에 의한 승리 전투로 기억하는데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흥화진 전투가 수공에 의한 승리 전투이다. 또한 당시 적들을 수장시킬 정도로 강력한 수공을 펼칠 수 있는 거대한 둑을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현재 토목기술로도 불가능하다. 다만 대열을 흐트러뜨릴 정도의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 이때 고려 기병을 보내 혼란에 빠진 거란 기병의 대열을 완전히 무너뜨린 것이 바로 흥화진 전투이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했지만 소배압은 개경을 향해 바로 공격해 들어갔다. 이는 거란 기병이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감찬 장군은 계속해서 별동대를 보내 거란군의 대열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이 개경 근처까지 다달았다. 문제는 개경에 방비할 군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고려 현종은 청야 전술을 선택한다. 개경 주변 들판의 곡식을 모두 치우고 들판을 불태우는 것이다. 개경 주변에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고 개경 성문을 걸어 잠그고 결사항전을 하자 소배압은 적잖이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소배압은 1019년 2월 개경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하기에 이른다. 퇴각하는 거란군을 향해 강감찬 장군은 계속해서 추격해서 거란군을 괴롭혔다. 그러면서 거란군을 귀주로 몰아세웠다. 그리고 귀주에 고려군을 총집결 시켰다. 그리고 1019년 2월 1일(양력 3월 10일) 귀주에서 결국 고려군과 거란군은 전투를 벌였다. 이날 전투에서 고려군이 크게 승리를 하면서 귀주대첩은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거란군 10만 중 살아 돌아간 병력이 수천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있다.강동6주 지켜내
귀주대첩은 고려-요나라의 26년에 걸친 장기간의 전쟁을 종식시킨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해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넘보지 못하게 됐다. 거란군이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다. 서역에서부터 만주까지 당할 군대가 없었다. 하지만 고려군이 그런 군대를 맞아 승리를 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다. 고려군이 20만이고, 거란군이 10만이었기 때문에 다수가 소수를 상대로 승리한 전투가 무슨 대승이냐는 말이 있지만 거란 10만은 대부분유목민 출신의 기병이면서 거란 황제 친위군 5위 중 하나였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10만 탱크 부대를 소총부대 20만이 맞서서 승리한 전투라고 할 수 있다. 귀주대첩의 승리는 서희 담판으로 얻어낸 강동6주를 지켜낼 수 있었고, 오늘날 한반도의 압록강 경계선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된 전투이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