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대선 끝난 이틀 뒤
1997년 대선 당시 전두환-노태우 특별사면이 이슈가 됐다. 당시 이회창 후보가 두 전직 대통령의 특별사면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면서 다른 후보들도 특별사면에 대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당시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 모두 전두환-노태우 사면 복권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에 대해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입장이 점차 선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9997년 12월 20일 김영삼 대통령은 김대중 당시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고, 이틀 뒤인 22일 국민 대화합 명분으로 특별사면으로 전두환-노태우가 풀려난다. 그리고 황영시 등 12.12 및 광주학살 관련자 12명, 안현태 전 대통령 경호실장 등 전직 대통령 부정축재 관련자 3명, 이양호 전 국방부장관과 박은태 전 의원 등 김영삼 시기 비리사건으로 복역된 인사 23명 역시 사면으로 풀려났다. 지금까지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당선인 중 누가 먼저 사면을 꺼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혹자는 김영삼 대통령이 먼저 꺼냈다고 하고, 혹자는 김대중 당선인이 먼저 꺼냈다고 한다. 하지만 누가 먼저 꺼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전두환-노태우 특별사면 이후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 모두 이미지가 실추했다.국민 화합·지역갈등 해소
특별사면의 명목은 국민 화합과 지역갈등 해소이다. 22일 2년 남직 수감생활을 마친 전두환-노태우는 석방됐다. 전두환은 안양교도소에서 노태우는 서울구치소에서 출소했다. 전두환은 “최근의 경제대란으로 국민 여러분이 얼마나 놀라고 불안해할 것인지 걱정이 많습니다. 피땀 흘려 이룩한 경제가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본인은 80년 9월에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당시는 경제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나라가 어지러워 도탄에 빠져 있었지만, 우리 국민은 이를 극복하고 세계가 놀란 선진국가를 이룩했습니다”면서 자신의 5공 업적을 찬양했다. 12.12와 5.18에 대한 사과가 전혀 없었다. 노태우는 죽는 그날까지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과오에 대해 사과를 했지만 전두환은 죽는 그날까지 사과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민주 진영에서는 전두환-노태우를 사면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김영삼, MB 때 청와대에서 전두환에게 호통
김영삼 전 대통령은 비록 사면을 단행했지만 전두환에 대해 그 이후에도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퇴임 이후 일본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국식 발음을 했지만 전두환만은 일본식 발음으로 ‘젠또깡’이라고 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당시 전직 대통령 초청 청와대 만찬에서 전두환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경제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을 해서 나라가 절단났다”고 힐난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화를 내면서 귀가를 했다. 이후 이명박 정부인 2010년 청와대에서 전직 대통령 연회가 있었는데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당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두환이는 와 불렀노? 쟈는 대통령도 아이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는 몬 간다”라고 개망신을 줬다. 만찬에서 전두환이 “와인 더 없느냐”고 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니는 청와대에 술 처무러 왔나”고 면박을 줬고, 전두환은 화를 참지 못하고 귀가를 했다. 그리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후에도 전두환 사면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알려졌다.저작권자 © 파이낸셜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